[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미국이 강대국인 이유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국에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1999년 9월 부모님이 뉴욕 집에 다니러 오셨다. 관광을 안 가겠다는 아버지를 설득해 차로 모시고 워싱턴DC.에 갔다.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을 본 뒤 아버지가 제퍼슨 기념관은 안 가겠다고 해 의아했다. 링컨 기념관을 서둘러 보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도착했을 땐 문 닫을 시간이었다. 바리케이드를 치려고 준비하던 병사가 캐딜락 승용차가 다가오자 멈칫했다. 내가 내려서 “한국전 참전한 상이군인이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참배하고 싶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문 안에 주차하라고 했다.

트렁크를 열고 내가 휠체어를 꺼내자 병사가 달려와 뒷문을 열고 아버지 오른팔을 자신의 목에 두른 뒤 두 팔을 뻗어 엉덩이 밑으로 넣고 아버지를 번쩍 들어 올려 의자에 앉혔다.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놀란 아버지가 땡큐를 연발하며 병사의 팔을 가볍게 두들겨 줬다. 그 병사는 언덕진 길을 가볍게 휠체어를 밀고 앞장서 올라갔다. 참배한 뒤 아버지는 한참을 머물다 내려왔다. 그 병사는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를 같은 방법으로 들어 올려 차 뒷좌석에 앉혔다. 아버지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 병사의 주머니에 넣어주며 악수를 청했다. 문을 빠져나와 굽은 길을 돌 때까지 백미러로 본 그 병사는 거수경례하고 있었다.뉴저지 집으로 돌아오는 4시간 동안 흥분한 아버지는 쉬지 않고 말씀하셨다. “그 병사 너도 봤잖냐? 미국이 강대국인 이유를 아느냐?”고 말문을 연 아버지는 바로 “보훈이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국가부터 설명했다. 나라 국(國)자는 ‘혹시 혹(或)’자에서 파생된 글자다. ‘창 과(戈)’자와 무기로 지켜야 할 도시를 나타내는 ‘입 구(口)’ 자로 이루어졌다. 원래는 혹(或)자가 국(國)이란 뜻이었다. ‘혹시’란 뜻으로 쓰이자 ‘에워쌀 위(囗)’를 추가했다. 성벽을 나라 둘레로 쌓아 영토를 나타낸 모양이다. 아버지는 “원래 왕이 거주하는 도성이란 뜻이고 방(邦)자가 나라를 뜻했다. 한나라가 건국되며 초대 황제 유방(劉邦)의 이름을 피휘하면서 국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버지는 “어쨌든 미국은 조국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다. 돌아갈 나라가 없는 그들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우리와 다르다”고 했다.

그 병사의 익숙한 손동작을 일일이 되새긴 아버지는 느닷없이 고사성어 ‘간뇌도지(肝腦塗地)’를 끄집어냈다. “삼국지에 나온다. 장판 전투에서 조운이 조조의 대군을 혈혈단신으로 돌파해 유비의 어린 아들 아두(유선)를 구출했다. 조운이 유비에게 구출해온 아들을 건네자 그는 땅에 내던지며 자기 아들 때문에 조운이 죽을뻔했다며 부하를 먼저 챙겼다. 감복한 조자룡이 ‘비록 간과 뇌수가 땅에 쏟아지더라도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雲雖肝腦塗地 不能報也]’라는 말에서 이 말은 유래했다.”

다시 찾아보니 간뇌도지는 간과 뇌수가 땅에 쏟아지는 것처럼 참혹하게 죽은 모습을 이르는 말이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하는 것을 비유한다. 조자룡보다 훨씬 이전부터 써오던 성어다. 사기(史記)에 나온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평정한 뒤 낙양을 도읍으로 결정하려 할 때 누경(婁敬)이 황제에게 도읍으로 정하면 안 된다고 간청할 때 나온 말이다. 그는 유방이 70차례의 큰 전투, 40차례의 소전투를 치르며 천하의 무고한 백성들의 간장과 뇌수가 대지에 쏟아지게 했다[使天下之民肝腦塗地]고 고했다. 유방은 누경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꿔 관중(지금의 서안)을 도읍으로 삼고 그에게 자기 성씨 유(劉)를 하사했다.아버지는 “워싱턴 장군의 부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이 연방정부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자 토머스 제퍼슨은 반대했지만, ‘이들을 푸대접하면 미국의 미래는 없다’라면서 국채를 발행해 독립유공자 보훈 경비를 마련했다. 그가 오늘날 강대국 미국을 설계한 장본인이다. 그런 설계 때문에 그 병사는 가보지도 않은 나라에서 온 나를 공대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그 병사 뒤엔 든든한 미국이 있고 적과 대치해 더 절박한 우리는 그게 없다”며 아쉬워했다. 손주가 훌쩍 자라기 전에 가르쳐 줘야 할 심성이 ‘애국심’인데 우리에겐 그런 설계가 없어 더욱 아쉽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