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비엔날레에 '2cm 개미' 달랑 하나 보낸 카텔란

(정준모의 아트 노스탤지어 2회)마우리치오 카텔란과 제1회 광주비엔날레

어떻게 160만이나?

지금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1995년 9월 20일~11월 20일) 기간 중 TV만 틀면 아침 저녁으로 광주비엔날레 소식과 출품된 작품을 소개하는 방송이 나오던 것을. 생소하고 낯설었던 비엔날레라는 녀석을 이렇게 처음 만난 지 어느덧 28년이 흘렀다.한국민은 물론 세계의 미술인들 모두 불안한 시선으로,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광주비엔날레는 외국인 2만5017명을 포함해 163만4925명의 관객을 모았다. 순수 행사경비 78억원을 지출하고 입장료에서 67억원, 수익사업에서 22억원의 수익을 올려 순수익 11억원을 기록했다. 이런 데서 ‘성공적’이란 평가를 얻은 가운데 첫 번째 막을 내렸다.

미술에 대한 관심과 집중도가 높아진 지금도 한국의 관객 수가 15만~30만명에 불과한 것을 보면 당시의 열기를 가늠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의 모든 길은 광주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하루 평균 관람객 2만6666명이 모여들었다. 총 관람객 중 단체관람객이 42%를 차지했고, 이중 단체 학생관람객 비율이 90%(총 관람객의 38%)에 달했다. 당시 한국은행 광주지점이 집계한 지역경제 파급효과는 788억원에 이르렀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문화예술행사와 걸맞지 않은 이런 세세한 결과와 분석을 했던 것은 불안한 ‘지속가능성’ 때문이었다. 도쿄비엔날레(1952~1990)가 문을 닫고 1992년 타이페이비엔날레가 창설됐지만, 여전히 아시아에서 비엔날레를 개최하는 것은 문화외교 역량이나 재원 등 문제로 어려운 과제였다. 당시 작가와 커미셔너를 상대해야 했던 필자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2년 뒤에도 광주비엔날리게 '확실하게' 열리느냐는 질문이었다. 일회성 행사에 힘 빼기 싫다는 것인데, 광주와 광저우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속상했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박하다. 하지만 광주비엔날레가 확실히 자리잡을 수 있었던 배경과 이유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은 꼭 필요하다. 제1회 비엔날레의 작가 섭외, 작품 운송, 통관, 설치, 운영 전반과 홍보를 책임졌던 필자의 눈에는 '증인으로서의 예술'(큐레이터 임영방) 같은 미술사적인 작품, 유명작가가 함께하는 블록버스터급 전시가 낯설고 생소한 '국제현대미술전'을 보완했다.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매체이자 예술을 다룬, 백남준과 신시아 굿맨이 디렉터를 맡은 '인포아트전'(큐레이터 김홍희)을 비롯해 '광주 5월정신'(큐레이터 원동석, 곽대원), '문인화와 동양정신'(큐레이터 장석원), '한국현대미술의 오늘전'(큐레이터 서성록,윤진섭), '한국 근대미술 속의 한국성전'(큐레이터 윤범모, 최열) 등 6개의 특별전이 다양한 관객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시켜 줬다.

또 백남준과 임영방의 아이디어로, 짧은 시간 내에 세계 각 지역의 미술 현상을 추출·집합시키기 위해 대륙별로 커미셔너를 둔 방식은 세계 미술현장의 생생한 담론을 날 것 그대로 광주로 이식하는 탁월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비엔날레가 열리기 15년 전 ‘1980년 광주’를 외면했던 국민의 마음 속 부채의식이 비엔날레를 핑계로 광주를 찾아 '안부'를 확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의 민주적 시민정신과 예술적 전통을 바탕으로 건강한 민족정신을 존중하며 지구촌 시대 세계화의 일원으로 21세기 아시아문화의 능동적 발아를 위한 중심축임을 자임한다”는 선언문과 함께 '경계를 넘어(Beyond the Border)'를 주제로 택했다. 본 전시인 '국제현대미술전' 외에 '증인으로서의 예술'전 등 특별전을 포함해 13개의 전시에 58개국, 608명 작가의 1288점의 작품이 출품된 물리적인 양도 한 몫 했다.하지만 다음커뮤니케이션과 손잡고 당시에는 생경했던 컴퓨터통신망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하고, 지금은 당연한 홈페이지를 통한 비엔날레 소개는 물론 관람 및 숙박, 식당, 교통 예약 등의 편의를 온라인에서 제공한 것도 주효했다, 연일 방송 4사가 아침 저녁으로 비엔날레 소식을 생중계처럼 송출한 덕도 컸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전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 란츠베르기스(Vytautas Landsbergis, 1932~ ),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1936~2018) 등이 한데 어우러진 개막공연도 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다.


상?

광주비엔날레의 시상제도는 지금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1회 비엔날레는 신생 비엔날레에 작가들의 참여를 끌어내고자 대상 1인과 특별상 3인을 선정. 수상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현대미술에 우열을 매기는 건 난센스라는 안팎의 지적에도 불구, 작가 참여를 견인하려는 목적이 컸다.제1회 대상은 '잊어버리기 위하여(Para Olvidar)'를 출품한 쿠바의 알렉시스 레이바 마차도(Alexis Leyva Machado, 1970~ ), 예명 크초(Kcho)에게 돌아갔다. 상금 5만달러(4500만원). 특별상은 한국의 김정헌(1946~ ), 미국의 다이애나 새터(Diana Thater, 1962~ ), 호주의 트레이시 모팻(Tracey Moffatt, 1960~ )이 수상했다. 부상은 순금 행운의 열쇠.

크초는 쿠바 국적이어서 한국에 입국하려면 비자가 필요했다. 작품제작을 위해 방한할 수 없었던 그는 2500개의 빈 포도주(VINO) 병을 모아 그 위에 매우 낡은 배를 올려놓으라고 지시하는 스케치만 팩스로 보내왔다. 이때 VINO라는 단어를 두고 ‘포도주’라는 필자와 ‘맥주’라는 전시부 내 다수 유학파 의견이 엇갈렸는데, 결국 맥주병으로 유학파의 주장이 먹혔다.

물론 바로 오류를 깨달았지만, 이미 광주 오비맥주공장에 병을 부탁한 후라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개막식에 온 작가는 크게 문제될 것 없다고 했지만, 포도주 병이 맥주병으로 바뀌고 낡은 배를 구하려고 TV뉴스에 배를 구한다는 자막까지 내보냈던 일을 생각하면 당시 에피소드만 모아도 책 두서 너 권은 족히 될 것이다.

1997년 2회 비엔날레는 처음엔 시상제도를 폐지할 것처럼 했으나, 결국 ‘지구의 여백’이란 주제 아래 5개의 소주제로 나눠 전시를 구성했다. 이때 주제별로 5명에게 공로상을 줬는데, 각각 3000달러(약 270만원)를 상패와 함께 수여했다.

그리고 3회는 월드컵과 비엔날레를 같은 해에 열려는 계획에 따라 한해를 건너뛰어 2000년에 열었다. 이때부터 유야무야 이유도 없이 시상제도가 사라졌다가 2010년 8회를 맞아 ‘눈 (NOON) 예술상’이란 이름으로 부활했다. 이때는 2개 부문을 시상했는데, 중견작가에게 수여하는 ‘2010 광주비엔날레 눈(Noon) 예술상’은 폴란드계 영국인 구스타프 메츠거(Gustav Metzger,1926~2017), 신인에게 수여하는 눈 후원상은 양혜규(1971~ )가 받았다. 상금은 각각 5만달러(4000만원), 2만달러(1800만원)로 상금과 함께 상패가 수여됐다. 상의 이름 ‘눈(Noon)’은 인간의 시감각 기관인 ‘눈’과, ‘전성기’ ‘절정’ ‘최고점’을 뜻하는 영어단어 ‘Noon’을 중의적으로 담아낸 것이었다.

2012년 9회 광주비엔날레의 ‘눈 예술상’은 한국의 문경원·전준호가, 후원상은 일본의 모토유키 시타미치(Motoyuki Shitamichi, 1978~ )가 수상했다. 상금은 각각 1만달러(900만원), 5000달러(450만원)로 줄었다. 2014년 10회 예술상은 이불(1964~ ), 후원상은 세실리아 벵골리아(Cecilia Bengolea,1979~ )와 프랑수아 세뇨(François Chaignaud,1983~ ) 듀오가 수상했다. 상금은 전 회와 같았다. 또 창설 20주년 기념 특별상은 32세에 요절한 일본의 테츠야 이시다(Tetsuya Ishida, 1973 ~2005)에게 돌아갔다.

2016년 11회부터 시상제도를 없앴다. 믿을 수 없지만, 매회 적어도 30억원 정도의 국비 지원을 받는 광주비엔날레가 시상식에 쓸 예산 1500만 원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렇게 없어진 시상제도를 슬그머니 부활시켜 2023년 14회부터 ‘박서보 예술상’이란 명칭의 시상제도를 시행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14회부터 2042년까지 20년 동안 매회 상금 10만달러(1억3000만 원)의 박서보 예술상을 시상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을 두고 '군사독재 시절 관변 미술계 수장',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외면한 '광주 정신과 무관'한 인사라는 이유로 폐지를 위한 1인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개막 초기 '비엔나 소시지를 절대 반지로 표현'한 자해 홍보영상만큼 불편한 홍보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런데 더 불편한 것은 1년 전 ‘박서보 예술상’을 제정한다고 발표했을 때는 한마디 없다가 막상 수상자를 발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폐지’를 주장하는 행태다. 후배 예술가 양성을 위해 선의로 적잖은 사재를 내놓은 박서보가 표적이 되고 있다.

사실 ‘박서보 예술상’에 대한 답은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가 먼저 해야 한다. 재단 측은 왜 갑자기, 뜬금없이, 어떤 이유로 시상제도가 필요했는지 설명부터 해야 한다. 단지 기부자가 나타나 상을 만들었다면 무책임 한 일이다. 어느 인사의 말처럼 광주비엔날레가 생존작가의 이름을 딴 예술인상을 제정하기 전, 그 예술인의 삶의 궤적이 광주정신에 합당한지 등을 제대로 살폈어야 했다.

또 폐지론자들의 주장대로 설혹 광주비엔날레의 국제적 명성에 숟가락을 얹을 요량으로 박서보와 기지 재단이 기부 의사를 표시했다 하더라도 비엔날레재단이 이를 간파하고 거부하지 못한 책임이 더 크다. 또 시민과 지역 미술인들의 의중을 살피지 않은 책임도 있다. 상의 제정도 폐지도 비엔날레 몫이고 재단의 권한이며 결정인데, 왜 상금을 기부한 박서보가 성토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폐지론자들은 힘 있는 재단에 대한 관대함을 박서보의 삶의 궤적을 과하게 들춰내는 선명성으로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삶까지 비난받을 이유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이도 없다. 오늘날 미술인으로서 박서보의 예술적 성과는 “사유는 없고 노동만 있는 작품”이란 혹평부터 “한국적, 동양적 사유의 세계를 ‘비워내는 행위’를 통해 현대적으로 구현했다”는 호평까지 작품에 대한 비평은 어느 누구의 무슨 말도 가능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비평은 하되, 비판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을 두고 누구도 비난할 자격은 없다. 누구나 치열하게 살아 온 때문이다. 박서보도 그렇다. 상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박서보가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민족기록화로 1973년 '수출선박', 1976년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 시킨 사명당(송운대사)'를 그렸다는 이유로 “군사독재 정권 관변 미술계 수장”, “4·19 혁명에 침묵하고, 5·16 군부정권에 순응했으며 군사독재 정권이 만든 관변 미술계의 수장이자 미술 권력자”라 상을 폐지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원칙이라면 앞으로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모든 작가들도 예외가 될 순 없다.

상의 폐지를 진정 원한다면 결정권을 가진 (재)광주비엔날레에 존폐를 요구할 일이다. 재원을 기부한 박서보를 비난하고 기부를 철회해 상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치에 맞는 태도도 아니고, 기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상이 꼭 필요해 기부자를 찾다보니 상의 명칭을 ‘박서보 예술상’이라 한 것인지, 기부의사를 밝히자 재단이 알아서 ‘박서보 예술상’을 만들어 준 것인지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또 기부자 박서보 삶의 공과 중 지나치게 과에 대한 지적과 주장을 일삼는 것은 상의 폐지가 목적이 아니라 소위 미술계의 고질적인 진영논리에 의한 속칭 모더니즘 계열을 공격하려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상의 폐지론자들도 이 점을 유념해 대승적인 차원에서 상을 제정한 당위성을 재단에 묻고, 기부자 개인의 인간적인 흠결을 지적하는 일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재단도 보도자료 하나로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상의 제정이유를 설명해 선의의 기부자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의 책임이 있는 상을 제정한 당사자인 재단과 광주시가 기부자에게 쏟아지는 비난 뒤로 숨는 태도는 비겁하다.


깜깜이 현대미술

1995년 광주비엔날레는 회화 중심의 미술에 익숙했던 우리 관람객들에게 충격이자 혼란이었다. 특히 생소했던 설치미술이 주를 이루면서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설치 비엔날레’가 되었고, 일부에서는 '설치가 설친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생면부지의 현대미술은 많은 관람객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관객에게 불친절한 현대미술 현상을 두고 당시 한 일간지는 “10평 남짓한 깜깜한 전시장 안 한쪽 구석에 조그만 전구를 하나 밝혀놓고 그 밑에 길이 2㎝ 남짓한 개미 모양 미니어처를 달랑 설치한 작품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관객을 '갖고 놀았던' 작품은 지금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WE'의 주인공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1960~ )의 작품이다.

당시 6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목표로 했던 전시팀은 작품을 고려한 공간구성과 전시 디자인보다는 시간당 1200~1300명의 관람객이 전시장을 빠져나가는 동선 확보가 더 시급했다. 그래서 동선을 중심으로 좌우로 작가별로 화이트 큐브 형태의 25평, 15평, 10평 정도의 전시실을 하나씩 배정했다. 이때 카텔란은 가장 큰 전시실을 요구했고, 15평 정도의 전시실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작가는 일정상 방한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약 60×60×150㎝ 정도 크기의 상자에 작품만 보내왔다. 작품 운송을 위해 보험가와 작품 크기 등을 물었지만, "작품을 받아보면 안다"는 말과 함께 작은 LED 독서 등 즉 요즘 USB전원을 사용하는 침대 옆에 두는 초소형 북 라이트만 하나 준비해 달라는 것이었다.

작품상자를 해포하자 정말 개미가 한 마리 나왔다. 작품제목은 프랑스어로 '공동 1위'라는 의미의 '타이(Tié)', 작품 제작 연도는 1995년 신작이었다. 재료는 세라믹과 금속이었는데, 흙으로 개미의 몸통을 만들고 다리와 더듬이는 철사로 만든 뒤 검은 칠을 한 작품이었다. 크기는 3×1.5×1.5㎝, 상자를 열었을 때 크레이트 크기에 비해 너무 약소해(?) 다른 것도 들어 있을지 몰라 박스를 뒤집어보았지만 그뿐이었다.

막상 작품을 대하니 너무 큰(?) 작품이라 모든 힘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개미는 총 3개가 만들어진 에디션작품으로, 작가가 서명한 진품증명서가 함께 들어있었다.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작가의 진품을 확인하는 서명이 없으면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작품보다 진품 증명서, 즉 종이한장이 더 중요한 개념미술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2011년 10월 런던의 경매에서 추정가 5만~7만파운드(8350만~1억1700만원)에 나와 9만1250파운드(1억5235만원)에 낙찰됐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 출품작이란 전시이력과 제1회 광주비엔날레 도록에 수록됐다는 서지이력(Literature) 과 함께. 당시 카텔란을 추천한 이는 유럽 커미셔너를 담당한 장 드 루아지(Jean de Loisy, 1957~) 당시 퐁피두센터 큐레이터였다.

그는 블랙 유머와 풍자를 주 무기로 현대미술의 존재와 현대미술에 대한 제도, 그리고 현대미술을 사랑하는(?) 그의 고객들을 곤혹스럽게 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전시를 찾고 작품을 보는 건 “너희들 젠체하려고 이곳에 왔지”라고 놀림을 받으러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1995년 제도로서 광주비엔날레를 놀림감으로 삼은 카텔란은 1999년 현대미술에 돈과 명예를 부여하는 장치, 제도로 전락한 비엔날레를 비트는 작업으로 '낙원의 곤경(Trouble in Paradise)'이란 주제를 내걸고 제6회 캐리비안 비엔날레 (6th Caribbean Biennial)를 개최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상상한 진정한 ‘가짜’ 비엔날레였다.

그는 자신을 비롯해 비크로프트(Vanessa Beecroft, 1970~ ),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1967~ ),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 1966~ ), 마리코 모리 (Mariko Mori, 1967~ ), 크리스 오필리(Chirs Ofili, 1968~ ), 가브리엘 오로즈코(Gabriel Orozco, 1962~ ), 엘리자베스 페이튼(Elizabeth Peyton, 1965~ ),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 1962~ ), 토비아스 뢰베르거(Tobias Rehberger, 1966~ ),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1966~ )등 당시 예술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잘 나가던 작가 10명을 카리브해의 매혹적인 섬 세인트 키츠(Saint Kitts)에 1주일간 초대해 질펀하게 휴가를 즐겼다. 그리고 그 성과물로 만든 도록을 발행했다.

광주비엔날레 창설 이후 각 나라와 도시는 비엔날레를 창설하면서 세계화를 내세웠고, 미술시장은 스타덤을 낳았다. 그러나 예술의 식민주의 문제는 여전했다. 이런 부조리를 비틀기 위해 선동한 이는 카텔란과 젠스 호프만(Jens Hoffmann, 1974~ )이다. 이들은 여느 비엔날레와 마찬가지로 카리브해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비엔날레는 지나치게 많은 국제 비엔날레에 자주 참여하는 소위 비엔날레 작가들에게는 재미없고 지루하고 어리둥절한 비엔날레였다. 카텔란과 호프만은 기존의 비엔날레라는 제도를 패러디했다.

이들의 목적은 일반적인 전시회, 비엔날레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자체를 배제하는 데 있었다. 즉 회화와 조각, 비디오와 설치미술이 없는 비엔날레를 만들어 제도적 비평을 시도한 것이다. 10명의 작가가 휴양객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놀고 낮잠을 즐기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좌절된 이상주의적 장난과 한층 진지한 제도적 비판 아래 태어난 캐리비안 비엔날레는 카텔란의 이전 작품 중 하나로 비엔날레의 참여를 의미하는 '가고 싶은 곳을 고른 뒤, 미술관이 휴가비를 내도록 하는 법(Choose your Destination, How to Get a Museum-Paid Vacation)'(1995)의 연장선에 있다. 카텔란은 그런 의미에서 광대이자 현자이자 교활한 선동자이다. 캐리비안 비엔날레는 국제 비엔날레의 의미와 목적을 강탈하는 한편 유쾌하게 비웃는 미술계 내부로부터 적대적 인수를 의도했던 것이다.

보도자료는 비엔날레가 ‘국제 예술계와 지역 사회 간의 대화와 관계 구축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자 카리브해 지역과 연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비엔날레는 훨씬 더, 그리고 의식적으로 배타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지역 커뮤니티에 참여하거나 상호작용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비엔날레의 출품작들은 비평과 실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리버풀, 시드니, 광주 등 어디에서나 쉽게 전시할 수 있는 휴대용 예술 작품이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단순한 복제는 약간의 비틀림이 있더라도 비평에서 피해 갈 수 있었다.

행사는 광범위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언론인들은 반갑지 않아 했다. 이로 인해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대중들은 멍청이들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비엔날레라는 틀은 관람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지만, 작품의 부재는 작가 자신이 사색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또한 비엔날레는 완전히 사적인 것으로 구성됐고, 공적인 강의, 심포지엄, 아티스트 토크 등은 아예 없어 불안과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비엔날레라는 제도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놀림감이 돼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멍청이들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광주광역시와 (재)광주비엔날레는 고리타분한 시상제도를, 전시 주제나 예술감독과는 관계없이 누가 왜 어떻게 운영하는지 모를 국가별 파빌리온이란 때늦은 방식을 ‘새로운 것’이라 포장해 그날그날을 이어가고 있다.여전히 광주에 갇혀있는 것이다. 광주 정신을 세계 속의 민주화 정신으로 승화시키고자 출발했던 명분은 사라지고, 매회 비엔날레를 운영하는 데만 급급하다. 28년간 14번째 비엔날레를 치르면서 아직도 “오늘의 새로움은 곧 내일의 진부함”이라는 현대미술의 명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광주비엔날레를 어찌할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