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군의 신년 인사

[arte] 김연수의 듣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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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그가 눈을 떴을 때, 운전사의 뒷목에 노란 솜털이 돋아 있는 게 보였다. 혹시나 해서 옆 얼굴을 살폈더니 부리가 보였다. 잠이 확 달아났다 그는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하고 운전석 의자를 두들기며 말했다.

“병아리 군? 병아리 군 맞지?”운전사는 몸을 엎드리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룸미러로 그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약간 졸린 눈이며 하얀 줄이 선명한 부리로 봐서 분명 병아리 군이 맞았다. 그는 반가워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이 시간에, 이렇게 택시를 운전하는 자네를 볼 줄이야! 반가워.”

그 날 그의 회사에서는 직원들과 거래처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하는 송년회가 열렸다. 일어서려는 사람들을 붙잡아 앉히며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그가 거리로 나가보니 핸드폰을 들고 택시를 잡으려는 취객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러다 하나둘 떠나가고, 그는 혼자서라도 더 마시고 싶었다. 술집을 찾아 헤매다 그는 컴컴한 길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거기서 되돌아 나가려니 맥이 풀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기에 그런 어둡고 막다른 골목에 서 있게 된 것일까? 혼자서라도 더 마시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일찍 일어서려는 사람들을 붙잡을 때부터? 어쩌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인생은 잘못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그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빈차 등을 밝힌 노란 택시를 발견했다. 뜻밖의 행운에 기뻐하며 그는 뒷좌석에 올라타 집 주소를 말하고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가 처음 길 모퉁이에서 만났던 게 그러니까…….”
“아마도, 30년 전이었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아리 군이 하이톤의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30년 전, 둘은 학교 앞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그는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다. 어떤 아저씨가 병아리를 팔고 있길래 그도 구경이나 하다 갈 생각이었는데 좀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종이상자에 든 병아리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다 노란색이었으면 모르겠으나 개중에는 분홍색과 파란색도 있어 더 불쌍하게 보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용돈을 털어 부리에 하얀 줄이 선명했던 병아리를 샀다. 그게 바로 병아리 군이었다. 병아리 군을 집에 데려가자 그의 부모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그를 혼냈다. 혼나면서도 그는 좋았다. 병아리 군이 더 이상 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둘은 줄곧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다.

“정말이지, 긴 세월이 흘렀어. 그런데도 자네는 왜…….”
“왜 아직도 그때 그대로냐고 묻고 싶은 거지?”
“맞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알아차리는 것도 여전하군.”집에 들어오면 그는 제일 먼저 병아리 군과 눈을 맞추기 위해 방바닥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밖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즐거웠던 일도, 슬픈 일도. 실수해서 혼나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일까지도. 그러면 다 듣기도 전에 병아리 군은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랬구나. 저랬구나. 말도 안 돼. 잘 했어. 괜찮아. 괜찮다구.

“이상하지 않은가? 자네는 어떻게 지금도 병아리 군일 수가 있지?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자네는 이미 병아리 군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커버렸었는데. 정말 잘 자랐지.”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호황기였다고나 할까.”

병아리 군이 회상에 잠겨 1990년대를 회고했다.
“세상 모든 게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지. 이사 갈 때마다 아파트 평수가 늘어났고, 한 해가 지날 때마다 연봉도 인상됐지. 호황기의 병아리였으니 내 성장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지.”
“모르긴 해도 우리가 헤어지자마자 자네는 수탉이 됐을 거야. 그만큼 컸으니까. 그 일만 아니었다면 말이야.”

그 일이란,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병아리 군이 흔적도 없이 방에서 사라진 일을 뜻했다. 놀란 그가 거실로 나가 병아리 군의 행방을 묻자 엄마는 간밤에 병아리 군이 떠났다고 했다. “나한테 작별인사도 없이요?”라고 그가 묻자, 곤히 자고 있어 깨울 수가 없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어떻게,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날 수가 있어?”
30년 전의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그가 병아리 군에게 따졌다.
“미안, 미안.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수평아리인 나는 어차피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어. 산업적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으니까. 하지만 너를 만나 사랑도 받고 세상 구경도 하고, 나는 정말 좋았어. 그 방에서 보낸 나날들을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거야. 내가 떠난 뒤, 나를 위해 울어준 일도.”
병아리 군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를 위해 내가 울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걸 내가 왜 몰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하고 지내는지 나는 다 알지. 은혜를 갚는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돌보고 또 돌보는 것.”

그날 밤, 일기장에 ‘어젯밤에 병아리 군이’라고 쓰는데 학교 앞에서 병아리들 사이에서 병아리 군이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연필에 힘을 줬다. ‘떠났다. 인사도 없이.”라고 쓴 뒤에 그는 ‘내가 자는 바람에.’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울었다. “그때 엄마는 네가 너무 커져서 아빠가 외갓집에 데려갔다고 나한테 그랬는데, 그거 사실이야?”
병아리 군을 보며 그가 물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게 왜 궁금해?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게 맞겠지.”
“그러면 이상하잖아. 지금은 늙은 수탉이 돼 있어야지. 거울을 좀 보라구. 병아리 군은 여전히 병아리 군이야.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는데.”

그러나 병아리 군은 거울로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대신 앞쪽 도로를 바라봤다.
“조심해. 강변도로에 들어왔으니 이제 달릴 거야. 안전벨트를 꽉 잡아매라구.”
룸미러로 그를 힐끔 쳐다보고 나서 병아리 군은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