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숲이 된 버려진 택배상자… 샴페인과 예술의 동거

[arte] 최서경의 파리통신
뤼나르 '샴페인과 산책을' 전시 리뷰
1729년 시작된 프랑스의 뤼나르 가문은 샤르도네 품종을 기반으로 하는 샴페인을 만든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토양 보존 등에 힘쓰는 샴페인 하우스이기도 하다. 환경 친화적 제품을 만들기 위해 100% 종이로 이루어진 병 모양 선물상자를 구매 고객에게 제공한다.

뤼나르는 예술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브랜드다. 매년 현대 예술작가와 협업해 재해석된 리미티드 에디션를 선보인다. 2008년부터 매년 여름 예술가를 초대해 몇 주 간 샴페인 하우스의 역사와 삶에 몰입할 기회를 준다. 초대받은 예술가는 뤼나르의 역사, 유산, 노하우 등을 자신의 영감과 관점을 담아 회화, 조각, 설치, 사진, 디자인 작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낸다. 첫 해엔 마르틴 바스(Maarten Baas)가 참가했다. 이후 더스틴 옐린은 에드몽 뤼나르의 여행을 담은 몽환적 유리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었고, 위베르 르 갈은 포도밭의 1년을 표현하는 12개의 유리 조각 달력을 제작했다. 피에트 하인 에크는 1769년 루이나르가 발명한 최초의 샴페인 운반 상자를 연상시키는 기념비적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이 작품은 조각과 건축의 중간쯤에 있는 형태. 매년 새로운 아티스트가 뤼나르와 함께 했다.

Eva Jospin

올해는 에바 조스팽(Eva Jospin)과 협업했다. 랭스 대성당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 포도밭, 지하실로 개조한 지하 구덩이, 자연 친환경적 방침 등이 그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전시 입장권에 샴페인 한잔이 포함되어 있어 누구나 샴페인을 마시며 전시를 구경할 수 있다. 그녀의 작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택배 상자가 맞나 싶은 정도로 택배 상자를 정교하게 깎아 반지의 제왕에 나올 것 같은 판타지 같은 공간을 창조해냈다.
전시의 제목과 맞게 전시장의 벽들은 우리가 숲을 온 것처럼 꾸며져 있어 실제 뤼나르 포도 농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택배 상자로 만든 설치 작업, 자수, 그림까지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 특히 대지의 느낌이 강렬했다. 와인에 있어 떼루아가 중요하듯 대지가 주는 다양한 체험과 모티프들이 작품 속에 녹아들었다.

작가가 협업해 만든 25개의 한정 뤼나르 샴페인 보관함과 샴페인이 특히 인상적이다. 택배 상자를 깎아 만든 샴페인 보관함은 나무 사이에 샴페인이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을 줬다. 종이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재료이지만 다른 재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기에 무시되기 쉬운 재료.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무대디자이너를 꿈꿨었고 그렇기에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재료가 필요했다. 또 택배 상자에는 청동이나 대리석과 달리 예술가에게 이상적이고 실용적인 재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택배 상자는 활용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대표적인 종이. 이런 재료가 거대한 작품으로 탈바꿈하자 재료가 가진 일회성은 무한성으로 전환됐다. 종이를 통해 다시 나무와 숲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뤼나르의 예술가 협업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공연과 함께 가수와 랩퍼들이 주류 브랜드와 협업하는 일은 자주 벌어지고 있고, 의류 브랜드 등과 팝업 전시를 하는 일도 잦다.
하지만 아직 개별 주류 브랜드가 예술가와 직접 협업하는 장기적이고 혁신적인 예술 활동은 드물다. 예술가가 그 브랜드를 어떻게 해석하는 지를 알리는 일은 대중들에게 브랜드의 가치를 가장 강력하게 인지시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이러한 방식이 많아지면, 예술가들 역시 새로운 영감과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작업 세계를 구축하고 문화적 가치와 유산을 만드는 데 한 축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