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점의 마네와 드가 모은 오르세, 인상파 두 거장의 미스터리한 관계

[arte] 김미경의 파리통신 (2)

I. 마네와 드가, 그들의 미스터리한 관계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은 지난 3월 28일부터 전 세계로부터 온 200여 점의 마네(1832~1883)와 드가 (1834~1917)의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오는 7월 23일까지 예정된 두 인상파 화가의 대면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수많은 작가 중에서 왜 그들을 하나로 묶었을까? 드가가 죽었을 때, 그는 수십 점의 마네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다. 나이가 비슷한 두 사람은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고 회화의 주제로 파리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것까지 공통점이 많다. 하지만 둘은 공식적인 서신을 주고받은 일이 없어서 서로에 대한 생각을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다. 오랑주리와 오르세 미술관의 과학고문 스테판 게강(stéphene Guégan)에 따르면 둘은 모리조의 살롱이나 경마장, 음악 모임, 카페, 그리고 시인, 작가들과 더불어 만났다고 한다.

마네와 드가는 사실주의 화풍에서 벗어나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탁월한 해석력으로 현대회화의 지평을 넓힌 대가라 할 수 있다. 그들의 대화, 대면 그리고 갈등이 그들의 작품 활동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자기만의 독특한 영역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 사이에 존재한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화폭은 낱낱이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에드가 드가, '마네와 마네 부인'(1868), 유화, 기타큐수 시립미술관

우선 드가가 그린 1868년 작품 ‘마네와 마네 부인’ 그림을 보자. 마네는 드가가 선물로 그려준 준 그림을 자른다. 그림의 오른쪽 일부분이 잘려져 있다. 그 부분은 마네의 아내가 피아노를 치는 부분이다. 아내의 부분을 잘라내고, 마네는 아내가 피아노 치는 초상을 그린다. 마네의 1868년 작품 ‘피아노 치는 마네 부인’이 그것이다. 드가는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는 모델을 아름답게 묘사하지 않았다. 마네의 조카 줄리 마네에 따르면 삼촌은 수잔(마네의 아내)이 너무 못생기게 나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네는 아내의 부분을 오려냄으로써 자신의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을 표출했다. 또한 잘라낼 부분을 대체할 아내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갈무리했다.

마네와 드가는 서로를 관찰하고, 대화하고, 존경했으며, 서로를 견제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전시회 공동 큐레이터 이졸드 플뤼데흐마쉐(Isolder Pludermacher)에 따르면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현대성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라고 마네와 드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들의 화폭을 통해 그들의 예술적, 정신적 교류를 짐작해보자.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1868~1869), 유화, 오르세 미술관 소장

마네의‘발코니’(LeBalcon, 1868~69)와 드가의 ‘가족 초상화’(Portait de Famille, 1858~59) 속에서 화면구성의 유사성을 관찰할 수 있다. ‘발코니’의 세 명의 인물과 ‘가족 초상화’의 엄마와 두 자녀의 구도는 모두 삼각형 구도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발코니는 사회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혁명적인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주체성이 강조되어 표출된다. 필립 솔레(Phillipe Sollers)에 따르면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와 메리 로항(Méry Laurent) 등을 그린 마네의 여성 초상화는 “육체적, 영적인 모험”을 담고 있다고 한다.
에드가 드가, '가족 초상화'(1858~1869), 유화, 오르세 미술관 소장드가의 ‘가족 초상화’ 같은 경우 남편과 아내 사이의 단절과 긴장감이 등을 돌린 남편과 아내의 차가운 표정으로 표현된다. 또한 밝은 옷차림을 한 아이들의 공간과 아버지의 어두운 공간이 대조를 이룬다. 드가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가족관계를 삼각구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드가의 그림에서는 남녀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 자주 눈에 띈다.
왼쪽, 에드가 드가, '압상트'(1875~1876), 유화, 오르세 미술관 소장 오른쪽, 에두아르 마네, '자두'(1877), 유화, 워싱턴 미술관 소장

매춘부라는 같은 소재를 그린 부분에서도 두 화가의 다른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마네의 그림 ‘자두’(La prune, 1877~1878)에서 소녀는 명령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손에 담배를 쥐고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그녀의 삶은 온통 장밋빛이다. 밝은 색상의 옷과 발그레한 얼굴빛이 약간은 몽상적인 느낌까지 자아낸다.그에 비해 드가의 ‘압상트’(L’Absinthe)에서 모델은 압상트를 마시는 다소 침울하고 얼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에 무관심한 듯, 옆에 앉아있는 남자 또한 그림의 분위기를 한층 어둡게 하고 있다. 여자 모델이었던 엘런 앙드레, “내 앞에는 압생트 놓여있다. 조각가 데스부땅(Marcellin Desboutin) 앞에는 무알콜 음료가 놓여져 있다. 세상은 뒤집혔고, 우리는 둘 다 얼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림을 평가했다.
에드거 드가, '욕조'(1886), 파스텔, 오르세 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 '욕조'(1878), 파스텔, 오르세 미술관 소장

드가는 1877년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 후 목욕하는 여자의 그림을 그렸다. 마네도 이듬해 같은 주제로 누드화를 그렸는데, 그것이 ‘욕조’(Le tub, 1878) 이다. 마네의 그림은 구도, 색감, 장식성 면에서 드가의 ‘욕조’(Tub, 1886)와 많이 비슷하다. 드가는 이 주제로 말년에 수많은 그림을 남기기도 한다. 드가의 ‘욕조’를 살펴보면 표현기법에서 구체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모델의 긴장된 근육이 섬세하게 느껴지며, 인물과 주변의 작은 소품 배치도 신선하다. 수직으로 잘라진 화면구도가 마네의 그림에서는 수평으로 나누어져 있다.


II. 현대성의 문을 연 두 거장

에두아르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8), 유화, 만하임 쿤스트할레 미술관 소장.

여기서 각각의 화가의 성격과 삶을 짚어보는 것도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마네는 ‘풀밭 위의 식사’(Le déjeuner sur l’herbe, 1863~1868)나 ‘올랭피아’(Olympia, 1863) 등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그림을 그렸다. 비평가들의 가혹한 비평에 고통을 받기도 했는데, 작가 프루스트가 그의 고통을 전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는 비평으로 잔인하게 고통받았다. 마치 채찍 같은 비평이었다, 그런 비평은 그의 특징을 무력화시킬 정도였다.” 그런데도 마네는 정치적 저항을 이어갔으며,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L’exécution de Maximilien, 1868)은 제2 제정의 정치 실책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로 읽힌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1867년 프랑스 정부가 멕시코 황제로 즉위시킨 막시밀리안 1세가 멕시코의 후아레스 대통령에게 총살당한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자신이 내세운 황제를 외면한다. 이를 조롱하는 그림이 바로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다. 총살하는 군인의 군복이 프랑스 군복과 너무 비슷하여 프랑스 정부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있다는 암시를 준다. 이 그림에 대한 드가의 일화가 흥미롭다. 마네가 51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그림은 그의 상속자에 의해 크게 네 부분으로 잘려 판매되는데, 여기저기 팔려나간 그림을 산 사람이 바로 드가이다. 그만큼 드가가 마네의 그림을 좋아했고 그의 화풍과 정신을 존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두아르 마네, '나나'(1877), 유화, 오르세 미술관 소장

마네는 여성들과도 편안한 관계를 유지했고, 당차고 주체적인 모습이나 자연스럽게 삶의 기쁨을 찾는 모습을 포착해낸다. 에밀졸라의 소설 <나나>의 여배우 나나를 그린 그림은 어떤가.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팜므파탈 나나, 그녀의 속옷 차림은 매춘부에 대한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고고한 체하는 상류층을 조롱하는 것으로 읽힌다. 더 나아가 나나는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순수한 물질성을 추구한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와 달리 마네는 사회현실과 현상에 주목했고, 대상과 존재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인물을 의식이 있는 존재, 즐거움·허무·지루함·고뇌·지겨움을 가진 존재로 형상화함으로써 인물은 그 공간에서 살아 숨쉬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얼굴은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차단막, 가면으로 본연의 자아를 숨기고 있다. 바로 이점이 역설적으로 인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

그에 비해 드가는 그림의 구도 면에서 현대적 감각과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드가는 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데생을 했고, 낭만주의 화풍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인상파 화가로 분류되기 좋아하지 않았지만, 빛의 효과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다. 그의 창작 노트인 <그림 아이디어, 관찰과 사색>에서 드가는 “저녁의 효과에 대해 많이 연구해야 한다. 램프, 양초 등등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빛의 원천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빛의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를 한마디로 인상파 화가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빛의 효과에 골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드가도 마네처럼 소외된 사람, 세탁부·웨이트리스·발레리나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쿠르베가 일상적인 인물을 주제로 삼았다면 드가는 일상적인 인물의 일상적인 동작에 주목했다. 그의 실험성은 무대 뒤의 이야기, 경마 시작 전, 지친 몸으로 겨우 벤치에 걸터앉은 무용가, 목욕을 마친 후 수건으로 발을 닦는 소녀의 몸짓처럼 수없이 별 의식 없이 하는 동작을 구체적인 묘사로 새로 태어나게 했다. 마네가 인물의 얼굴 표정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드가는 몸에 관심을 가졌다. 지독한 관찰 꾼이 아니라면 포착하기 어려운 모습을 그의 시선은 맹렬히 쫓아간다. 그가 친구 월리엄 시케르(William Sickert)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삯마차는 싫어, 거기선 사람들을 볼 수가 없잖아. 나는 합승마차가 좋아, 서로서로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드가는 일상의 몸짓으로 내면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대단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가 모델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모델의 가장된 모습이 아니라 본모습, 자신도 모르게 내보이는 모습을 포착하려 했기 때문이리라. 힘들고 지친 모습, 하품하는 모습, 넋이 나간 모습, 엉거주춤한 동작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드가는 그것이 더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에드가 드가, '뉴올리언즈의 목화공장'(1873), 유화, 뽀보자르 미술관 소장 드가는 1872년 미국 루이지애나에 있는 외삼촌을 방문하면서 당시 흑인 노예해방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흑인들은 실질적인 평등 없이 여전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다. ‘뉴올리언즈의 목화공장’(Le Bureau de coton à la Nouvelle Orléans, 1873)은 상징적으로 그가 겪은 흑인 노예들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목화는 쓰이지 않은 역사, 흑인 노예의 고통 어린 삶을 상징한다. 필립 아르티에르(Philipe Artières)는 그의 저서 <에드가 드가의 뉴올리언즈의 목화 공장>에서 흑백의 대립에 대해 설명한다. 이 분명한 대립은 명백히 정치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목화의 하얀 빛은 마치 조명처럼 반짝거리는데, 이는 “흑인 노동의 상징”이다. 드가가 보수주의자라 할지라도 아주 가까이서 역사의 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그 또한 마네처럼 제도에 반항적인 태도는 적극 취하지 않았지만 무관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양의 문화에서 라이벌 의식은 대놓고 표현할 수 없는, 조금은 민감한 부분이다. 즉 겉으로 드러내면 저급함, 용렬함을 보이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그 경쟁의식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적대적 감정에 파묻히지 않고 타인의 성취를 올바르게 인정해주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들여다보며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만큼 훌륭한 성장 동력은 없다. 마네의 장례식에서 드가는 “마네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위대한 화가”라고 선언한다. 그들의 치열한 교류 덕분에 우리는 회화의 현대성에 새로운 지평을 연 두 거장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