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쁜 책'으로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에 관한 특별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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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내가 책방지기를 맡고 있는 ‘처음책방’이 품고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어여쁘다. 내 손길을 거치지 않은 책이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모은 초판본과 창간호는 그 장르와 유형이 매우 다양하다. 문학도서의 초판본뿐만 아니라, 각종 만화잡지와 성인잡지 및 월간지·주간지 등 잡지류는 물론 수백 종의 일간신문·지역신문 창간호, 전문서 및 사전류와 각종 참고서의 초판본도 있다.
가장 오래된 책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선생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1910년 10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조직해 조선의 고서(古書)와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려는 계획에 따라 펴낸 <동국통감(東國通鑑)>(1함5책)과 <삼국사기(三國史記)>(2책)가 있다. 그리고 1934년 출판된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고등농림학교 개교 25주년 기념 논문집>이 있는데, 여기엔 ‘동양의 파브르’로 불리는 우리 나비학자 석주명(石宙明, 1908~1950) 선생의 논문 두 편과 우리나라 최초의 조류학자 원홍구(元洪九, 1888~1970) 선생의 논문이 실려 있다.
또, 김기림(金起林, 1907~?) 시인의 시집 <바다와 나비>는 1946년 신문화연구소에서 발행된 시집으로, 그의 대표작 ‘바다와 나비’를 표제작으로 삼았다. 다만, 오랜 세월을 견디다 못해 많이 손상된 상태라 못내 아쉽다. 그 대신 1951년 전쟁 중에 서울에서 발행된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시의 정수를 느끼고, 1955년 영웅출판사에서 발행한 박목월 시인의 첫 시집 <산도화>를 통해 청록파 시인의 초창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1956년 정음사에서 발행한 영랑 김윤식 시인의 <영랑시선(永郎詩選)>도 만날 수 있다. 이 시집에는 김영랑 시인의 대표작들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또, 황순원(黃順元, 1915~2000) 선생의 명작 ‘소나기’가 실려 있는 소설집 <학(鶴)>(1956)을 만나는 감동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최명희의 <혼불>,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 등의 대하소설 초판본을 통해 그것의 최초 발행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도 있다.책방을 찾아오는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 책으로 최인훈(崔仁勳, 1934~2018)의 대표작 <광장(廣場)> 초판본을 들 수 있는데, 1961년 ‘정향사’라는 출판사에서 발행된 이 책은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을 가장 잘 조명한 문제작으로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여전히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인훈 선생이 생전에 열 번 이상 개정을 거듭하는 바람에 개정판이 계속 발행된 터라 초판본의 가치는 더욱 커졌다.
또 하나, 박완서(朴婉緖, 1931~2011) 선생의 등단작이자 최초 장편소설 <나목(裸木)>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아니라 당시 박완서 선생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여성동아 복간기념 제3회 50만원 고료 여류장편소설 당선작’이라는 표제 아래 여성동아 1970년 11월호 ‘별책부록’으로 발행된 것이라 매우 귀한 책이다.
그밖에 만화 단행본으로 <검정고무신> 초판본 전권과 방학기 원작 <바람의 파이터> 초판본 전권, 외국만화 한국어판으로는 <슬램덩크>, <코난>, <드래곤볼> 등의 초판본 전권을 볼 수 있다.정기간행물로는 월간 <뿌리깊은 나무>와 <씨ᄋᆞᆯ의 소리>는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모두 모아 놓았으며, 우리나라 최장수 문예지 월간 <현대문학>도 1955년 1월 창간호부터 125호까지 약 10년치 분량을 모았다.
그밖에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문학사상> 등 문예지 창간호 수백 종, 당대 최고의 지식인 교양지 <사상계> 창간호와 폐간호를 비롯해서 <한겨레신문>, <문화일보>, <국민일보>, <세계일보> 등의 일간지와 스포츠신문 등의 창간호도 모아놓았다. 각종 학술지와 기관지나 협회보 및 사보(社報) 수천 종과 <보물섬>과 <만화광장>을 비롯한 수백 종의 만화잡지도 누군가의 추억을 소환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2021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책방을 준비하면서, 책을 모으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다 보니 내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던 책들이 포장을 뜯어낼 때마다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정말 컸다. “아, 이런 책도 있었구나!” 하는 감탄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단행본이 5만 여종, 정기간행물이 1만여 종에 이르다 보니 이걸 모두 진열하기에는 공간의 역부족이라는 현실이 가장 난감했다. 그래서 그해 겨우내 책들과 씨름한 끝에 장차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바탕으로 2022년 3월에야 겨우 컨테이너를 창고 삼아 책방에 둘 것과 따로 보관할 것을 분리한 끝에 손님들을 맞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찾아오는 분들이 책방에 들어서면서 이구동성으로 “정말 멋지다!”라고 하시는 걸 보면 일단 ‘처음책방’의 첫인상은 괜찮은 모양이다. 그만큼 책방 가득 다양한 책들이 저마다의 책향(冊香) 또는 문향(文香)을 내뿜는 장관 그 자체와 함께 단행본뿐만 아니라 잡지나 신문 창간호가 즐비한 모습이 아마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옛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묘한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자기 나름의 관심 있는 분야를 정해서 그 분야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잡지나 책을 찾아보는 것도 책방을 찾아와 즐기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처음책방’에서는 원하는 사람에게 책을 팔기도 하고, 책을 사지 않아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공간(처음책박물관)으로 꾸며 나갈 예정이다. 또 훗날 연구자들이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책방에 있는 책들의 표지와 간기면(刊記面) 등을 디지털화해 데이터베이스화하는 한편, 메타버스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책박물관를 만드는 작업도 계획하고 있다. 나아가 내가 모은 책들이 구경거리로만 그치지 않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정말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요즘은 온통 그 생각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