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사랑은 일생을 관통할까… 연극 ‘인피니트 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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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상우의 아주 사적인 연극일기 - 극단 ETS의 ‘인피니트 에이크’연극은 찰스와 호프가 연애를 거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갖게 되는 평범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는 시간의 속도가 수십만 배로 빨리 흐른다. 관객은 배우들의 압축된 대사와 묘사를 통해 그 속도에 적응하며 이들의 생로병사를 지켜본다.
찰스와 호프는 큰 아픔을 함께 겪었고, 헤어질 뻔한 위기도 여러 번 넘기며 늙어간다. 여느 부부처럼 악을 쓰고 서로를 할퀴기도 한다. 젊은 시절의 부부를 연기한 허진, 권재은 배우의 연기도 풋풋하고 좋았지만 중년 이후를 분한 김준삼, 김혜리 배우의 연기가 특히 좋았다. 나 역시 그 중 한 시기를 관통하고 있어서인지 어느 때부터 사이코 드라마를 체험하듯 극에 몰입되었다. 남녀 주인공이 잠깐 방에 들어갔다 나오며 나이 든 배우로 바뀌어 등장하는 부분에서부터 나는 울컥했다. 분장을 통해 미래 모습을 미리 보는 어느 설정처럼 마치 나와 아내를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연극을 보기 며칠 전 부부싸움이 있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중학생 딸에 대한 문제였다. 어릴 때와 달리 쌀쌀맞고 짜증이 늘어난 아이가 나는 못마땅 했고, 아내는 그런 성마른 내가 불만이었다. 어쩌면 사춘기 자녀를 둔 집안의 흔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찰스와 호프처럼 우리도 독한 말을 뱉고 서로의 탓이라고 비난했다. 우리도 이 연극처럼 마음 설레며 사랑했던 이십 년 전과는 다른 후반부의 배우들 같았다. 찰스가 호프를 향해 “너는 내 말을 안 들어준다” 며 절규하고, 호프가 “당신은 내가 사랑했던 찰스가 아니라 이제 빈 껍데기일 뿐” 이라고 넋두리할 때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아마 대부분의 부부가 서로에게 이런 생채기를 만들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복 받은 커플도 있겠지만 그들은 제외. 한바탕 격랑이 지나가고 찰스는 호프에게 이야기 한다. “나한테 사랑은 아픔이었다” 라고...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아프다. 상대방이 영 내 뜻대로 해주지 않아서 아프고, 내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아프다. 사춘기 딸에게도, 부모를 향한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하는 한 아프다. 서로 사랑하라고 일생을 설파했던 예수도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팠을 것이다. 아픈 상처를 못 견디고 떠나가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아픔마저 또 사랑한다. 유행가 가사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갈수록 연애시절의 감정은 희미해져 가겠지만 다행히 아픈 상처의 기억들도 퇴색될 것이다. 망각은 여러모로 축복인 것이다. ‘첫 키스만 50번째’ 라는 영화가 있었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와 남자가 매일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 매일은 아니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같은 사람에 대한 사랑도 리셋할 필요가 있다. 늙은 찰스가 호프에게 다시 데이트 신청을 하듯이. 그렇게 다시 시작되는 사랑은 이전보다 오히려 서로에게 너그럽고 넉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내 초연의 희곡이 매끄럽고 속도감 있게 잘 번역되었고 연출은 끝까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극장을 나가는 관객들의 표정들이 밝았다. 사이코드라마가 심리치료의 방편이듯 좋은 연극은 심리적 건강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