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라고 무시했는데…중국에 허 찔린 한국 배터리

블룸버그 "한국, 중국 인산철 배터리 기술 배우기 열풍"
사진=한경DB
블룸버그통신은 15일(현지시간) 한국 배터리 회사들이 그동안 싸구려라는 이유로 외면해온 철 기반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LFP 배터리는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주력 제품인 니켈 배터리(NCM)에 비해 저렴하고 안전한 게 장점이다. 하지만 저온에서 성능이 떨어져 겨울철 전기차 주행 거리가 줄어든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단가가 비싸도 성능이 뛰어난 NCM 배터리에 주력해왔다. NCM 배터리는 니켈과 코발트 마그네슘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세가지 성분을 양극재로 쓰는 리튬 이온 배터리다.

블룸버그는 중국 업체들의 기술 개발로 인해 판도가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LFP 배터리 성능이 개선되면서 NCM만 고집해온 한국 배터리 회사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 주력해온 SK온이 LFP 배터리 개발에 발빠르게 뛰어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SK온은 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인터배터리 컨퍼런스에서 국내 기업 최초로 LFP 배터리 시제품을 선보였다. 당시 SK온은 이 제품이 저온에서 에너지 밀도를 높일 수 있다고 홍보했다. 황재연 SK온 기술경쟁력 담당 상무는 블룸버그에 "니켈 배터리 전극과 소재를 만드는 기술을 LFP 배터리에 적용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어 "SK온은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통해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도 최근 실적 발표에서 전기차용 LFP 셀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LG는 미국 애리조나에 에너지 저장시스템용 LFP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삼성은 2026년까지 LFP 배터리를 개발하려는 한국 정부 주도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포드 등에 양극재를 공급하는 에코프로비엠은 내년 말까지 LFP 파일럿 라인을 구축할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 LFP가 싸구려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블렌딩 기술'을 통해 LFP 배터리의 약점을 극복하고 있어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세계 최대 배터리 회사인 CATL은 에너지 밀도를 높이기 위해 NCM과 LFP를 혼합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CATL은 이 기술을 M3P라는 새로운 배터리에 적용될 것으로 KIEP는 전망했다. 강병우 교수는 "CATL의 혼합 기술로 인해 전기차 주행거리를 400㎞를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보여 한국 배터리 회사들이 놀랄 정도"라고 전했다.
이런 강점 때문에 중국산 배터리 점유율이 상승하고 있다. SNE 리서치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의 글로벌 합산 시장 점유율은 2021년 30%에 육박했지만 올해 3월말에는 25% 미만으로 떨어졌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 CATL과 BYD의 점유율은 35.2%에서 51.2%로 급증했다.

또 LFP가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규제를 피해갈 수 있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철은 IRA에서 중요 광물로 분류되지 않아 IRA 규제를 적용받지 않을 여지가 있다"며 "중국 기업들이 이런 허점을 이용해 세액공제 혜택을 받고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박 교수는 "한국 배터리 회사들은 상용화에 근접한 차세대 배터리 기술이 없는 반면 중국의 CATL과 BYD는 LFP 배터리 기술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배터리 회사들이 당장 LFP 기술을 접목하는데 어려움이 크다. NCM과 LFP의 생산 공정이 다르기 때문에 LFP 셀을 생산하려면 한국 회사들은 별도 공장을 건설해야 한다. 철 배터리는 니켈 배터리와 같은 시설에서 생산할 수 없다. LFP 제조 공정에서 철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별도 공정을 추가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한국 배터리 회사들이 LFP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데 원가 경쟁력이 변수가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용욱 한화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에 "한국 기업들도 여러 기술을 보완하면 결국 LFP 배터리를 만들 수 있다"면서도 "문제는 중국 경쟁사만큼의 원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느냐는 관건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