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거짓말쟁이 양치기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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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보들의 '위선범죄'와양치기는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반복했다. 마을 사람들은 매번 속으며 골탕을 먹었다. 그러다 진짜로 늑대가 나타났다. 양치기가 종을 두들겼지만 마을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늑대에게 물어뜯긴 양치기의 시체는 밤 언덕에 널브러져 있었다. 별들이 양치기 시체에 말했다. “너는 교훈이 될 거야.” 양치기 시체가 물었다. “교훈? 무슨 교훈?” 별들이 대답했다. “거짓말쟁이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교훈.”
그 '우호대중' 분석해왔지만
코인 사건 미화에는 두 손 들어
거짓을 팔아 부와 권력 누리는
'악한 양들의 사회'를 어찌할까
이응준 시인·소설가
대학에서 문학이론을 가르치던 시절, 나는 학생들에게 설명하곤 했다. “어떤 것이 이해가 안 되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이론은 후일 새로운 이론의 유행으로 교체되면서 문학으로 편입된다. 가령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다른 해법들로 인해 이제 정신치료에 거의 쓰이지 않지만, 문학의 일부분이 됐다. 프로이트의 업적은 ‘인간’을 법정에서 정신병원으로, 죄인에서 환자로 이동시킨 것에 있다.”‘가짜’ 진보 정치인들의 ‘위선범죄(僞善犯罪)’가 망국 지경이다. 이들은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도 민망한 저질로 전락했다. 대신 나는 주로 이들에 대한 여러 갈래의 ‘우호대중’을 분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대중파시즘, 반지성주의, 진영논리, 이권이득 생태계, 세대적 구조주의, 문화전체주의, 사이비종교 현상, 가학과 피학, 앵벌이 노예 심리 등 온갖 이론을 동원해 글을 써왔다. 그러나 최근 난리가 난 국회의원의 암호화폐 금융 범죄까지 미화하는 부류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속임수로 얻어먹는 빵에 맛을 들이면 입에 모래가 들어갈 날이 오고야 만다”고 잠언 20장 17절은 경고한다. 돈은 인간처럼 더럽지 않다. 돈은 객관적 물질이고 정치중립적이다. 돈으로 지은 죄는 죄로서의 모호함이 없다. 몇몇 정치인이 뇌물죄를 자살로 무마하며 한국 정치에 악영향을 남긴 것도 돈이라는 것의 선명성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별들이 물었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양치기의 시체가 대답했다. “공허해서.” 별들은 기가 막혀서 어두워지며 말했다. “좌우간 너 참 안 됐다.” 양치기 시체가 밤하늘을 향해 쏘아붙였다. “알고 싶지 않아.”
실존적 결핍의 문제에 교훈을 갖다 대니 답이 나올 리 없다. 자기가 하는 거짓말도 소중한데 자기 대신 해주는 거짓말이 안 소중할 리 없다. 내용은 무의미하다. ‘자신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몰두하는 타인에 대한 적개심’이 전부다. 파시즘은 이념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맞춰 발생하는 전염병이다. 내 정체성으로 인해 내가 타인과 구별되는 게 아니라 적(enemy)으로 인해 내 텅 빈 정체성이 채워지는 것이다.‘근대인’은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타인에 대한 증오가 필요 없는 홀가분한 ‘개인’을 의미한다. 대신 그는 그것을 자신의 직업노동과 직업정신에서 해소하고 승화시킨다. 도덕은 공자 맹자가 아니다. 도덕은 ‘직업도덕’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동시대인이라고 착각하기에 우리의 분란(紛亂)을 이해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모르는 자는 늘 화가 나 있고, 자신의 노동이 뭔지 모르는 자는 항상 타인을 공격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라는 속물은 남한테서 속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한테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의 거짓말보다 자기 거짓말을 더 믿고 있는 것이다.” 강한 사회는 아파도 진실을 견딜 수 있는 사회다. ‘거짓’을 세상에 팔아먹고 사람들을 세뇌시키면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존경까지 받는 자들이 있다.
양치기는 거짓말하기 전에 자신을 호수의 맑은 수면에 비춰봐야 한다. 그러면 놀랍게도 거기에는 양치기 자신이 아니라 병든 양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실제 자신의 차이가 바로 제 인생의 후진성이라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깨우쳐야 한다. 이 ‘악한 양들의 사회’를 어찌할 것인가. 거짓말쟁이 양치기의 몰락과 죽음을 지켜보는 그 양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다 거짓말쟁이 양치기다. 그 시절 내가 내 학생들에게 차마 가르쳐주지 않았던 지식이 하나 있다. 정반대로 문학이 사회과학이론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어두운 시대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 작은 글이 그런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