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불사조'…나를 태운 잿더미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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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이장욱의 청춘이 묻고 그림이 답하다Daniel Richter, Phienox, 252 x 368cm, 2000
독일 현대미술가 다니엘 리히터의 '피녹스'
열화상 카메라로 찍은 듯한 역사적 순간들
추상과 구상 경계 넘나드는 추상표현주의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작품들
불분명한 내일을 향해 오늘을 사는 인류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모습 투영
© Daniel Richter, Courtesy Deichtorhallen, Hamburg/ Falckenberg Collection ©Reuters
붉은 배경 아래로 흥분한 듯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은 노을이 지는 저녁처럼도 보이고, 사이키 조명으로 채워진 콘서트 현장 혹은 재난 현장처럼도 보인다. 그라피티처럼 분명한 테두리에 형광색으로 채워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예수의 순교나 마녀사냥의 한 장면 혹은 영화 속 좀비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열화상 카메라로 찍은 듯한 이 작품의 제목은 피녹스(Phienox)이다. 불사조란 뜻을 지닌 피닉스(Phoenix)에 단어 배열을 바꾼 피녹스(Phienox)는 다니엘 리히터(1962~)가 2000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2000년은 독일이 통일한 지 10주년 되는 해이다. 그래서 관람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림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담장을 보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그림은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의 미국 대사관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 현장을 찍은 사진을 작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한 그림이다. 이처럼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완전히 다른 사건을 한 화면에서 이야기하는 것. 감상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열린 결말을 가지는 것이 바로 다니엘 리히터의 현대적 역사화이다. 우리가 사실이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받아들이는 역사나 뉴스는 승자의 시각 혹은 누군가의 관점에서 기술된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의 파편 속에서 살아간다. 가끔은 자신만의 시각에 갇혀 객관성을 놓칠 때도 있고 때로는 누군가에 의해 가공된 해석을 자신의 견해라 믿기도 한다. 보이는 것과 실재 사이의 틈, 혹은 시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 작품의 제목을 피닉스가 아닌 피녹스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불사조는 수백 년에 한 번씩 자신을 불태우고 그 잿더미 속에서 다시 태어나 영원을 향해 나가는 존재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베를린 장벽과 누구의 공격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미국 대사관처럼, 그 견고한 것들이 무너지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또 역사다. 다니엘 리히터(1962~)는 독일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젊은 시절을 보낸 함부르크는 독일 최대 항구도시로 다양한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환락가를 중심으로 비틀즈를 비롯한 많은 밴드가 활동하고 성장한 곳이다. 작가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이는 함부르크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지역 자치권에 대한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언더그라운드 펑크록 밴드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젊은 시절 그들을 위해 음반 커버를 디자인하거나 공연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던 그는 독립 레이블 회사를 운영하며 밴드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장벽이 무너진 후, 1991년 느지막이 함부르크 미술대학에 입학한 그는 1995년부터 전문적인 화가의 길을 걷는다. 초기에는 네온이 연상되는 현란한 색상의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을 그렸는데, 2000년을 기점으로 추상 작품에 형상을 등장시키며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시기 작품들로 그는 독일의 주요 작가로 급부상했다. 그가 그림을 시작한 지 10년이 채 안 되는 시점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경험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일을 할 때도 있으며, 가끔은 잠을 잊을 만큼 무언가에 몰입할 때도 있다. 작가가 네온사인과 사이키 조명이 둘러싸인 곳에서 체득한 서브컬처는 그의 회화에서 음악과 그라피티적 요소가 가미된 과하게 채워진 색과 선으로 전환되었고, 사회운동을 하며 바라본 세계관은 회화 속 위트 넘치는 서사로 발전했다. 우리가 보낸 오늘은 대중이나 세상의 가치평가와 별개로 자기 근육을 키운다. 매일 순대 속 당면이나 밥알처럼 지하철로 밀려 들어가고 또다시 팝콘처럼 터져 나오는 일상 역시 나의 감정이나 컨디션과는 별개로 일을 수행해내는 지구력과 회복탄력성을 키운다.
우리의 내일 역시 적외선 카메라나 열화상 카메라처럼 불분명하다. 지금 스스로 하찮다 생각되는, 혹은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면 자신도 모르는 새 엄청나게 성장할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행운은 이 지루한 일상을 견뎌온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선물이다. 비슷해 보이는 하루였지만, 쌓여가는 시간의 주름 안에서 우리는 매번 죽고 새롭게 태어나길 반복한다. 그렇게 몸집을 불리다 보면 어느 날 각성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때가 오면 마치 헌 신발을 벗어 던지듯 어제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새 신발로 갈아신으면 된다. 그렇게 역사가 흐르고 오늘도 우리는 불사조처럼 집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