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데 돈도 잘 버네"…질투 한몸에 받은 미모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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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하나로 격동의 유럽을 살아낸르 브룅의 자화상.
18세기 최정상급 초상화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화가'
엘리자베스 루이 르 브룅(1755~1842)
“당신네 패거리가 잘나간다고 너무 뻐기지는 맙시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당신의 거만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고, 그림도 다 틀려먹었으니까!”1783년 프랑스 파리의 길거리 곳곳에서는 이런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공격 대상’은 여성 궁정 화가였던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 매력적인 외모의 미인이자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인기 화가로,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얻는 그녀가 ‘화가 최고의 영예’인 프랑스 왕립미술 아카데미 가입까지 이뤄내자 마침내 사람들의 질투심이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여자가 어떻게 저렇게 크게 성공할 수 있지? 뇌물을 줬거나 미인계를 쓴 게 분명해.”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엄친딸’이었던 그녀가 겪었던 어려움은 세간의 질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림 모델이었던 공주님들은 까탈스럽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습니다. 남편은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훨씬 많은 ‘웬수’ 같은 존재였고요. 친했던 왕족들은 프랑스 혁명으로 세상이 뒤집히면서 저잣거리에 목이 내걸렸고, 화가 자신도 돈 한 푼 없이 홀몸으로 망명해 12년간 유럽 각지를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르 브룅의 파란만장한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합니다.
‘보정의 달인’, 꽃길을 걷다
화가가 18세 때 그린 '에티엔 비제'(1773). 자신의 오빠를 그린 작품으로, 작가의 청소년기 최고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다른 성인 화가들과 비교해도 테크닉이 뛰어나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소장르 브룅은 정말 많은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먼저 그림 실력. 1755년 프랑스 파리의 화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틈만 나면 책과 공책에 그림을 그려댔습니다.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일곱살 때 ‘타고난 화가’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불과 18세 때부터 그녀는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전문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르 브룅이라는 이름이 파리 사교계에 널리 알려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실력에 더해 미모가 뛰어나다는 점이 큰 도움을 줬습니다. 그녀도 자신이 예쁜 걸 알아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자신의 자화상을 여럿 그린 거지요. 그녀의 자화상을 본 사람들은 화가가 이렇게 예쁘다는 사실에 한 번, 그림 실력에 또 한 번 놀랐다고 합니다. 그녀는 성격도 좋았습니다. 덕분에 모델을 편안하게 해 주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끌어내 화폭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가장 중요한 건 르 브룅의 ‘보정 실력’이 탁월했다는 겁니다. 사진관에 가서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는 촬영 실력만큼이나 보정 실력이 중요하지요. 초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더합니다. 초상화를 한 번 그리는 데 엄청난 돈과 시간이 들어가니까요. 그러니 최대한 잘생기고 예쁘게 미화해서 그리는 게 고객들의 기본 주문 사항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실물과 딴판으로 그릴 수는 없는 노릇. 그 선을 지키는 게 어려운데, 르 브룅은 모델을 자연스러우면서도 ‘뽀샤시’하게 그리는 데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 실력에 반한 대표적인 고객이 프랑스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와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입장에서는 시집간 딸이 잘 지내는지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합니다. “얘야,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초상화 하나 그려서 보내 보렴.” “예,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림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화가들의 ‘보정 실력’이 앙투아네트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화가는 외모의 단점, 그러니까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주걱턱과 튀어나온 눈을 무자비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반면 어떤 화가는 미화를 너무 심하게 한 나머지 ‘엄마도 못 알아볼’ 초상화를 그렸고요. 그렇게 속상해하던 앙투아네트는 마침내 르 브룅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뒤에야 “너무 잘 나왔다”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받아본 마리아 테레지아도 결과물에 흡족해했다고 합니다.'궁정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1778). 지난 3월 폐막한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 나왔던 작품이다. 앙투아네트는 이전에 자신을 그린 작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가들은 나를 절망에 빠뜨린다. 너무 형편없다"고 했다.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왕비는 "얼굴이 그렇게 안 닮아도 괜찮다. 궁정 복장을 한 네 모습이 보고 싶다"고 달랬다. 마침내 르 브룅의 이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야 앙투아네트는 만족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외모 특유의 단점을 절묘하게 보정한 실력 덕분이었다. /비엔나미술사박물관 소장
초상화를 그리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앙투아네트와 르 브룅은 동갑내기였습니다. 말도 잘 통했습니다. 둘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금세 가족처럼 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르 브룅이 바닥에 실수로 쏟은 붓을 앙투아네트가 주워주는 일도 있었고, 초상화를 그리다 쉬는 시간에 둘이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니까요.
왕비가 만족할 정도로 ‘잘 나오는’ 초상화를 그리고 나니 르 브룅의 그림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입을 거절당하던 왕립아카데미의 문턱도 왕비의 ‘백’ 덕분에 쉽게 넘을 수 있었습니다. 1783년, 그녀의 나이 불과 28세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겁니다.
‘빈털터리 싱글맘’ 신세 되다
딸과 함께한 자화상(1786). /루브르박물관 소장화려한 삶 뒤에는 사실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르 브룅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버지는 12살 때 세상을 떠났고, 새아버지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 르 브룅이 초상화가로 번 돈을 대부분 가로챘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한 남편도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노름을 즐겼고 돈을 물 쓰듯 썼거든요.
무엇보다도 르 브룅을 가장 괴롭힌 건 사람들의 질투였습니다. “저렇게 그림을 잘 그릴 리가 없다. 다른 화가가 대신 그려준 게 분명하다”는 둥, “미인계를 쓴 게 분명하다”는 둥 헛소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앙투아네트 왕비의 이미지가 워낙 사람들에게 안 좋았던 탓에 편견과 비난은 더욱 심했습니다. 음해가 갈수록 심해지자 스트레스로 르 브룅이 쓰러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러던 와중에 거대한 시련이 닥칩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세상이 뒤집힌 겁니다. 혁명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는 걸 느낀 그녀는 1789년 10월 6일 딸과 둘이 평민으로 분장해 간신히 프랑스를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4년 뒤, 앙투아네트 왕비가 단두대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마당에 돈을 챙길 여유 따윈 없었습니다. 남편은 프랑스에 남아 있었지만, ‘마이너스의 손’인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최고의 궁정화가에서 한순간에 ‘수배 중인 빈털터리 싱글맘’ 신세로 전락했습니다.딸과 함께한 자화상(1789). /루브르박물관 소장
붓 하나로 재기한 ‘슈퍼 맘’
지오반니 파이시엘로(1791). 르 브룅은 남성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파이시엘로는 이탈리아 지역에서 명성을 떨친 음악가로, 이 그림 속에서는 입을 반쯤 벌리고 눈을 하늘로 향한 채 영감을 얻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베르사유 박물관 소장막막한 상황이었지만 딸을 생각하면 힘을 내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녀의 명성은 외국 왕족과 귀족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르 브룅이 가는 곳마다 초상화 의뢰가 쏟아졌고, 그녀는 금세 다시 부자가 됐습니다. 초상화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력이라는 뜻에서 그녀를 ‘반 다이크 여사’ ‘루벤스 여사’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로마, 나폴리, 피렌체, 프라하, 베를린, 런던, 심지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까지…. 그녀는 유럽 각지를 돌며 왕족과 귀족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현지 화가들은 ‘굴러온 돌’인 르 브룅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배척했지만, 르 브룅은 가는 곳마다 후한 대접을 받았고 러시아 제국 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1800년)되는 영예까지 누렸습니다. 딸도 잘 키워서 모스크바에서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사윗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요.
그렇게 흐른 세월이 무려 12년. 마침내 프랑스의 정세가 안정됐고, 파리에 남아 있던 옛 동료들의 탄원 덕분에 마침내 그녀는 1801년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 돌아온 르 브룅은 87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우아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유행하는 화풍도 바뀌고 체력도 떨어져서 예전만큼 좋은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했지만, 그림도 계속 그렸고요. 인생을 통틀어 남긴 초상화가 총 660점이 넘습니다. 말년인 1835년부터 1837년까지는 세 권에 달하는 회고록을 써서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녀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입니다. 르 브룅의 유언은 이랬습니다. “Ici, enfin, je repose….”(마침내, 여기서, 쉬는구나….)'플로라로 그려진 줄리'(1799). 딸의 신화적 초상화로, 당시 줄리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수백년 전 외국인 초상화, 왜 인기 많을까
한동안 잊혔던 르 브룅의 작품은 20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근래 들어서는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요. 2016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그녀의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던 게 단적인 예입니다. 지난 3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합스부르크 600년전에서도 그녀가 그린 앙투아네트의 대형 초상화가 나왔었지요.'시빌라로서의 해밀턴 부인의 삶 연구'(1792). /개인소장수백 년 전 세상을 떠난 잘 모르는 외국인들의 얼굴이 왜 세계인에게 이토록 큰 인기를 끌까. 단순히 말하면 르 브룅의 그림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독창적인 스타일, 색의 대담한 사용, 옷과 머리 장식과 보석 등을 표현하는 솜씨 등을 아름다움의 이유로 댈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에 더해 그녀의 그림은 테크닉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한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애정이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르 브룅의 작품에서 모델의 외모를 넘어 그의 내면과 당시 시대상까지 읽어낼 수 있는 건 그 덕분입니다.
단순히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서 이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믿었습니다. 주변의 시선과 편견을 개의치 않고 끈기와 성실함으로 노력을 거듭했고요. 파란만장한 인생의 곡절을 겪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고, 낙천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르 브룅의 그림이 자연스럽지만 우아한 건 이런 화가 내면의 반영입니다. 덕분에 그녀는 지금까지도 18세기 최고의 초상화가 중 하나로 꼽힙니다.
봄날에 잘 어울리는 르 브룅의 그림들을 감상하시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참고자료) 이번 기사의 내용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 도록 'Vigee Le Brun'(Baillio, Joseph, Katharine Baetjer 등), 베르사유박물관장이었던 피에르 드 놀라크가 쓴 '비제 르 브룅 베르사유의 화가'(정진국 옮김, 미술문화), 뉴욕리뷰의 기사 'A Most Successful Woman', 베르사유박물관 웹사이트 등을 참조했습니다. 이번 기사의 그림은 화가의 삶과 관련된 작품 위주로 선정돼 있습니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 도록이 영문이지만 무료로 공개돼있고 비제 르 브룅의 일대기와 함께 그녀에 대한 평가와 여성 화가로서 느꼈던 점, 주요 작품에 대한 상세 설명 등이 모두 적혀 있으니 더 알고 싶은 독자분들께서는 일독하시기를 권합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