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돈 없다" 안 내고 버티더니…체납세금 100조의 진실 [관가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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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체납자 6.1%만 세금 냈다경기 안산시에 거주하는 임모 씨(50)는 2020년부터 종합소득세를 비롯해 총 11건의 국세를 내지 않았다. 불법도박 사이트 운영자인 임 씨가 체납한 세금은 1738억원에 달한다. 국세청이 공개한 개인 고액·상습 체납자 중 세금 체납액이 가장 많다. ‘남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세금을 내지 않다가 지난해 처음으로 명단이 공개됐다.
2004년부터 시작된 고액·상습 체납 명단공개 대상자는 체납발생일로부터 1년이 지나고 2억원 이상의 국세를 체납한 사람이다. 작년 말 누적 기준으로 4만명이 명단에 올라갔다. 국세청은 이들에 대한 은닉 재산 추적조사 및 출국 규제, 민사소송과 형사고발 등 강력한 조처를 하고 있다.국세청에 따르면 개인 체납자 체납액 2위는 불법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는 홍모 씨(46)로, 2017년부터 1632억원의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있다.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도 2003년부터 종합소득세 등 국세 1073억원을 내지 않고 있다. 개인 체납자 중 일곱 번째로 체납 세금이 많다.
21일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누계 체납액은 102조5000억원이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걷는 지방세는 제외한 수치다. 1년 전인 2021년 말(99조9000억원) 대비 2.6% 증가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7일 열린 체납세액 관리 관계기관 회의에서 “첨단 재산 은닉 수법과 변칙적 조세회피에 대응하기 위해 기관 간 원활한 협조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기 침체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 상황이어서 100조원이 넘는 체납세금 징수 활동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 1~3월 국세 수입은 87조1000억원으로 전년 동기(111조1000억원) 대비 24조원(21.6%) 줄었다. 4월부터 연말까지 세수가 작년과 똑같이 걷힌다고 가정하면 올해 세수 예상액은 총 371조9000억원이다. 기재부가 올해 편성한 세입예산(400조5000억원)보다 28조6000억원가량 부족하다.만약 102조원에 달하는 체납세금 중 30%가량만 걷을 수 있다면 올해 세수 결손을 채우고도 남는다. 하지만 실제로 이 돈을 걷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선 세무서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누계 체납액은 ‘정리 중 체납액’과 ‘정리보류 체납액’의 합계로, 국세 징수권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금액을 뜻한다. 국세 징수권의 소멸시효는 5년이며, 5억원 이상의 국세는 10년이다. 하지만 5년만 버틴다고 내야 할 세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국세청은 △납세고지 △독촉 또는 납부최고 △교부청구 △압류 등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 경우 소멸시효는 중단되고 납부 기간 및 압류 해제 기간이 지난 뒤 다시 5년간의 소멸시효가 새롭게 진행된다. 사실상 세금의 소멸시효는 없다는 뜻이다.다만 일부 사업자들은 폐업하면서 소득조차 없는 데다 남은 돈이 없어 내야 할 세금을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국세청은 징수 가능성이 작다는 판단에 따라 ‘정리보류 체납액’으로 분류한다. 정리보류는 2013년 국세징수법 개정에 따라 당초 결손처분이었던 용어가 변경된 것이다. 일정 사유의 발생으로 부과한 조세를 징수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다.
문제는 102조5000억원에 달하는 누적 체납세금 중 징수 가능성이 낮은 정리보류 체납액이 86조9000억원으로, 84.8%에 달한다는 점이다. 징수 가능성이 높은 정리 중 체납액은 15.2%인 15조6000억원에 불과하다. 국세청 관계자는 “100조원이 넘는 누적 체납세금의 대부분이 장부상 채권일 뿐 실제 걷을 수 있는 돈은 많지 않다”고 밝혔다.
특히 고액·상습 체납자들에게서 걷은 누적 징수 비율은 극히 저조하다. 지난해 말 기준 고액·상습 체납자들의 누적 체납세금은 42조5609억원으로, 전체의 41.5%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징수(현금정리)에 성공한 건 2조5916억원으로, 6.1%에 불과하다.세금의 소멸시효는 사실상 없지만, 체납자가 사망하는 경우는 예외다. 체납자 사망 시 자녀가 재산을 상속받으면 해당 재산에 대해 상속자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 문제는 체납자가 사망하면 상속 포기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통상 재산보다 체납액이 많다면 상속을 포기한다. 상속자가 없는 상황에서 은닉 재산을 발견하지 못하면 체납액은 징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2225억원을 체납해 고액·상습체납자 명단 공개가 실시된 2004년부터 15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5년 동안 체납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2018년 사망하면서 자녀가 상속을 포기했고, 이듬해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 경우 사실상 국세청이 돈을 받아낼 방법이 없다는 의미다. 국세청은 은닉 재산을 찾기 위해 빅데이터를 활용한 다양한 기업을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남은 재산뿐 아니라 소득까지 없는 체납자의 경우 사실상 징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국세청의 설명이다. 국세청은 징수가 어려운 체납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위탁하고 있지만 캠코 징수율도 연간 1% 안팎에 불과하다.국세청은 징수 가능성이 실낱같이 남아있는 경우라도 기획분석과 빅데이터를 활용해 현장 징수를 강화하고, 재산 추적전담반을 추가 편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단기·일시 체납자의 모바일 납부 독려를 확대하고 장기·고질 체납자에 대한 출석요구, 방문 독촉, 압류·매각 등 징수 활동을 강화할 계획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성실 납부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징수 활동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