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호랑이가죽그림, 호피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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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보름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유물들호피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28×395cm, 가나문화재단 소장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게 그림이 아니고 진짜라면 표범 여덟 마리를 사냥해다 가죽을 벗겨서 펼쳐야 가능한 일이다. 포악한 눈빛에 날 선 이빨을 드러낸 얼굴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발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서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커피콩 같은, 아니 화염 같기도 한, 그냥 의미없이 마구 찍어 놓은 점 같은 표범무늬는 매직아이처럼, 시신경을 교란한다. 어떤 표범은 날렵하고 어떤 표범은 육중하다. 벽에 발을 대고 기대서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갑자기 병풍 틀을 부수고 머리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현실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사람의 기억은 편한 대로 수정되기 마련인 것 같다. 이 작품을 거의 10년만에 다시 꺼내보았더니, 생각보다 키도 훨씬 크고, 넓은 폭의 연결 화면으로 꾸며진 병풍이었다. 그동안 수장고 이사도 하고, 사진 자료와 도서들을 정리하면서 수십 번 도판으로 보았던 작품인데, 이렇게 기억과 실제가 다를 수 있는 것인지!
이 작품이 수장고에서 나와 강제 소환된 것은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의 특별기획전 《조선, 병풍의 나라 2》(2023.1.6~2023.4.30)의 출품 요청이 계기였다.
이렇게 화면 한 가득 진짜 호랑이 가죽을 펼쳐놓은 듯한 형태로 그린 그림을 호피도(虎皮圖)라고 한다. 얼핏 보면 검은 먹으로 그냥 동그라미 그리고, 점 찍고 한 것 같아 보일 수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세필로 섬세하게 모질까지 살려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호피도는 이렇게 세밀하게 그려진다.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작품 수준의 평가나 가격에 차등을 두어도 될 것이다. 호피도 상세
호랑이는 줄무늬이고, 표범은 얼룩무늬라, 따지고 보면 표피도(豹皮圖)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호표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아서 대체로 호랑이가죽그림, 호피도라고 통칭한다. 우리 민화의 대표 주제인 ‘까치 호랑이’ 그림도, 경우에 따라선 표범과 까치가 눈맞추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그냥 다 ‘호작도(虎鵲圖)’라고 부른다. 심지어는 머리와 배는 얼룩무늬인데 등가죽은 줄무늬인 상상의 ‘호랑이표범’이 그려지기도 했다. 호작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채색, 93x60cm, 종이에 채색, 가나문화재단 소장호랑이든 표범이든 맹수의 가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용맹성의 표상이다. 구하기 워낙 어려우니 당연히 고가에 거래되었고, 부와 권력의 과시용도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시대를 호령한 재상들과 장수들이 호랑이 가죽을 걸친 대좌 위에 근엄하게 앉아있는 초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호피를 혼례 때 신부가 타는 가마 위에도 씌웠다. 호랑이는 무서운 동물이라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액막이를 위한 효용가치는 조선후기 호표(虎豹) 도상이 여러 곳에 널리 사용되는 기폭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때때마다 모두가 생 호피를 갖춘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니, 점차 그림으로 대체되었다는 추정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인 여닫이문에 발린 호피도가 그 생활상의 단면을 보여준다.호피도 병풍,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54×196cm(4폭),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다시 AMPA 전시에 출품한 호피도 이야기로 돌아오자. 작품을 다른 곳에 대여한다는 것은 자식을 학예회에 내보내는 느낌하고 비슷할 것 같다. 가장 예쁨 받았으면 하는 은근한 기대가 생긴다. 반응을 여기저기 확인해 보고 싶어진다. 요즘말로 ‘힙’하기로는 우리 애가 최고였던 것 같다. 호피도를 배경으로 멋지게 포즈를 취한 사진들이 SNS에 수없이 보였다. ‘레오파드 패턴’은 옛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데다가, 호랑이 머리와 꼬리가 생략되고 무늬만 큰 화폭에 펼쳐 놓으니 그 무심한 멋과 단순함이 현대적인 미감하고도 연결되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나도 그렇게 사진을 따라서 찍어보니 주인공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정말 병풍의 역할을 다하는 병풍이 아닌가 싶었다. 업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소문이 있다. 아마 어디에나 그런 믿거나 말거나 소리들이 있겠지만, 호피도 병풍과 관련한 카더라 하나 소개하며 곁들여 싱거운 제안 하나 해본다.
‘어느댁 어른께서 고집이 대단하셔서 손자 돌잔치에 쓴다고 키가 2미터나 되는 병풍을 겨우겨우 차에 싣고 갔는데, 펼쳐보니 방충제 냄새 폴폴나고 칙칙한 호피무늬 옛 병풍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며느리는 싫어했다 카더라’는 이야기다.
요즘 돌잔치에 가보면 아들이나 딸이나 나비와 새가 날고 꽃이 가득한 화조도 병풍뿐이다. 업체들에 과감하게 호피도 병풍 한 틀 갖추는 것 추천해본다. 부티도 나고, 액막이도 하고, ‘힙’하기도 하고 특색있고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