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사망 '급발진 의심 사고' 첫 재판…"전형적인 급발진" 강조

제조사 측 "국과수 결과 나오면 상세 반박" 손해배상 책임 부인
운전자 할머니 "죄책감에 살 수 없어…진실 밝혀달라" 호소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에서 운전자 측이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박재형 부장판사) 23일 차량 운전자와 그 가족들이 제조사를 상대로 낸 약 7억6천만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사건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원고 측 소송대리를 맡은 법률사무소 나루 하종선 변호사는 "이 사건은 급발진의 전형적인 4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며 '웽'하는 굉음과 머플러(소음기)에서 흘러나온 액체, 도로상 타이어 자국, 흰 연기를 언급했다.

하 변호사는 "블랙박스에는 차량 오작동을 나타내는 운전자의 음성이 녹음돼 있다"며 "30초간 지속된 급발진 사고"라고 강조했다. 가속 페달 오조작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체공학적 분석과 경험칙에 반한다"고 일축했다.

피고 측 소송대리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확인한 뒤 상세히 반박하겠다'는 뜻과 함께 "사건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체적인 서면을 준비 중이며, 최대한 신속히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소장을 1월에 접수한 점과 3월에 변론기일을 통지했던 점을 들어 "피고가 신속히 대응하지 않은 측면이 있어 이로 인한 불이익은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원고 측이 제출한 사고기록장치(EDR) 감정과 음향분석 감정을 모두 받아들였다.

원고 측은 사고 5초 전 차량의 속도가 110㎞인 상태에서 분당 회전수(RPM)가 5천500까지 올랐으나 '속도가 거의 증가하지 않은' 사실과 '가속 페달을 밟았다'는 국과수의 EDR 검사 결과가 모순되는 점을 통해 EDR의 신뢰성 상실을 증명하고자 EDR 감정을 신청했다.

또 정상적인 급가속 시 엔진 소리와 이번 사고에서의 엔진 소리 간 음향 특성이 다른 점 등을 밝히고자 음향분석 감정도 신청했다. 재판부는 6월 27일을 다음 변론기일로 지정하고, 이때 전문 감정인을 선정해 감정에 필요한 부분을 특정하기로 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운전자 A씨와 그의 아들이자 숨진 아동의 아버지가 발언권을 얻어 진실 규명을 호소했다.

A씨는 "사랑하는 손자를 잃고 저만 살아남아서 미안하고 가슴이 미어진다.

누가 일부러 사고를 내 손자를 잃겠느냐. 제 과실로 사고를 냈다는 누명을 쓰고는 죄책감에 살아갈 수 없다.

재판장님께서 진실을 밝혀주시길 간절히 바란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저는 죄인입니다.

손자가 살았어야 했는데…"라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아들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겨온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 급발진 사고"라며 "급발진 사고 원인을 전적으로 운전자에게 입증하게 하는 자체가 모순된 행위이며 폭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언제까지 제조사의 이권과 횡포 앞에 국민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가 도외시돼야 하느냐"며 "대한민국에서 급발진 사고는 가정파괴범이자 연쇄살인범"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끝으로 "부디 이번 사고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주시고, 대한민국은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회'라는 것을 알려달라"며 "급발진 사고 시 승소한 첫 사례가 되어 다시는 제조사가 방관하고 묵과하지 않도록 법 개정이 반드시 이뤄질 수 있도록 국회의원분들께도 간곡히 호소한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6일 강릉시 홍제동에서 60대 A씨가 손자를 태우고 운전한 스포츠유틸리티차(SUV)의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해 12살 손자가 숨졌다.

이 사고로 A씨가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돼 지난 3월 경찰조사를 받았다. 또 A씨 가족이 지난 2월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올린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결함 원인 입증 책임 전환 청원' 글에 5만 명이 동의하면서 관련법 개정 논의를 위한 발판이 마련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