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들 조용히 책 읽던 공유오피스에 한바탕 소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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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서의 책이 머무는 집“출판사들은 왜 마포구에 모여 있어요?” 햇병아리 문학기자의 첫 번째 궁금증이었습니다.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플랫폼P
마포구에 사는 출판인만 입주
"3년도 안됐는데 사라지나" 우려
"이 공간의 의미 다시 새겨 보자"
'책소동' 행사에 1000명 넘게 몰려
작년 이맘때 문학 분야를 처음 맡았어요. 내공이 부족하니 발품을 파는 수밖에요. 출판계 사람들을 만나려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 으레 약속 장소는 서울 마포구 상수동, 합정동, 동교동으로 수렴됐어요. 스마트폰 지도 앱에는 마포구 내 출판사·출판 에이전시 주소와 그곳 사람들이 추천해준 카페, 책방, 식당을 저장해둔 별이 쌓여 갔습니다.과거에는 임대료가 저렴했으니까, 대학가라서, 인쇄소가 모여 있는 파주로 넘어가기 상대적으로 수월한 위치라서, 마포구에 있는 또 다른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독립해서, 한국출판인회의가 세운 출판학교(SBI)가 마포구에 있어서…. 테이블 위에는 이런저런 추측만 난무했죠.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마포에 출판사가 유독 많다는 건 숫자로 분명하게 드러나요.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서울 소재 서적출판업 사업체의 16.8%가 마포구에 있어요. 전체 25개 구(區) 가운데 1위를 기록했어요(2021년 기준). 20년 가까이 매년 가을 홍대 거리에서 책 축제 ‘와우북페스티벌’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 덕분이고요.그러니 마포구가 2020년 8년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플랫폼P)’의 문을 연 건 전략적 선택이었죠. 플랫폼P는 출판계의 공유오피스이자 학교, 놀이터예요. 저렴한 임대료로 업무 공간을 내어 주고 창업 초기 출판사, 1인 창작자 등을 전문적으로 지원합니다. 마포구에 형성된 출판 생태계를 활용해 출판산업을 지방자치단체의 미래 먹거리, 창업 지원 아이템으로 낙점한 거죠. 서울시는 2010년 마포 일대를 디자인·출판 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했습니다.
이곳에는 현재 52개사가 입주해 있어요. 입주사 모집 공고 당시 5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곳들이죠. 그중에는 1인 출판사 레모도 있는데,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일찌감치 국내에 소개해 ‘선구안’을 인정받은 곳입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 <달까지 가자> 등을 낸 베스트셀러 작가인 소설가 장류진도 이곳에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근처에 있는 선배 출판인들은 이곳으로 찾아와 ‘꿀팁’을 후배들에게 나눠줍니다. ‘1인 출판사를 위한 계약서 작성법’ 같은 노하우를 강연해요. 맹수현 출판사 핌 대표는 창작자(시나리오 작가)로 입주했다가 이곳 강연 덕에 ‘출판사 할 결심’을 한 경우입니다.
플랫폼P 내 협업이 또 다른 책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입주사인 에디토리얼 출판사의 책 <진화 신화>는 역시 입주사인 디자인 스튜디오 ‘즐거운 생활’이,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는 또 다른 입주사 ‘동신사’가 편집디자인을 맡았습니다.왜 이런 공간이 필요할까요. 출판은 종합 예술이자 종합 노동이기 때문입니다. 기획, 저자 계약, 디자인, 인쇄, 유통 등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첫 책을 만드는 1인 출판사는 하다못해 책에 넣을 가름끈 샘플, 표지를 꾸밀 금박 샘플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플랫폼P에는 참고할 수 있는 샘플과 책이 있고, 도움도 구할 수 있어요.
혼자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저자 강연이나 북토크, 서울국제도서전 참가나 해외 출판인들과의 교류도 플랫폼P를 통하면 가능합니다. 이렇게 성장한 출판사는 다시 마포구의 예비출판 창업자를 지원하는 든든한 선배가 되겠죠.
김서연 한밤의빛 대표는 “15년 정도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가 창업했는데도 다른 차원의 어려움과 고민이 있었다”며 “한 공간에서 같은 목표로 나아가는 동료들이 있기에 실질적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어요.그런데 요즘 출판인들은 3년도 안 된 이 공간이 사라질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찾아간 플랫폼P 한편에 시위 피켓과 플래카드가 쌓여 있었어요. 3년 사이 구청장이 바뀌었는데 지난 3월 박강수 마포구청장이 이 공간의 용도 변경, 입주 조건 수정 등을 내비쳤거든요. 신규 입주사도 선발하지 않고 있어요.
마포구의 입장은 구 예산으로 운영되는 시설이니 마포구 주민에게만 플랫폼P의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조현익 플랫폼P입주사협의회장은 “운영위원회를 거치지 않았으니 조례에 어긋나는 데다가 마포구에 살지만 않을 뿐 마포구에 사업자등록을 한 출판인까지 배제하는 결정”이라고 지적합니다. 김 대표는 “오로지 출판일을 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낯선 마포구로 이사를 왔다”며 “신규 유입을 막는 조건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고 말했어요. 마포구가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당장 7월부터 플랫폼P 입주사가 절반으로 쪼그라들게 돼 설립 취지가 무색해질 지경이에요.
지난 13일 플랫폼P에서는 이 공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마포 책소동’ 행사가 열렸어요. 입주사와 그들의 책을 소개하고 사진 촬영, 그림 그리기처럼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강연 프로그램도 마련했어요. 동네책방 사장, 출판인을 꿈꾸는 예비 창업자, 그들과 함께 일하기를 꿈꾸는 작가, 디자이너와 번역가….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책을 아끼는 독자들이 플랫폼P를 채웠습니다. 이날 하루에만 1000명가량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 공간의 가능성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장면이 있을까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