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사장 만난 기시다의 깜짝 성과…日의 치밀한 연출이었다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반도체 기업 체면 살려라"…면담장소·날짜까지 계산
세계 이목 집중 G7 정상회의 직전 총리 '반도체세일즈'
삼성·마이크론·인텔 투자 약속하며 '대성공'
경계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사장이 지난 18일 일본 총리관저를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자료 : 총리관저
삼성전자와 TSMC 등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면담은 일본 정부의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25일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해외 반도체 대기업의 투자 유치로 자국 반도체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 회담 장소와 날짜까지 고려했다.

지난 18일 경계현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 사장과 류더인 TSMC 회장, 팻 겔싱어 인텔 CEO, 산자이 메로트라 마이크론테크놀로지 CEO, 세계 1위 반도체 장비업체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의 플랩 라저 반도체부문 CEO, 다리오 길 IBM 부사장, 벨기에 반도체 연구개발 기관인 imec의 막스 밀고리 부사장 등 7명이 도쿄 총리관저에서 기시다 총리와 면담했다.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의 CEO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가 정상과 만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3월부터 반도체 기업 CEO와 기시다 총리의 면담을 기획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려면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힘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미국 및 유럽 국가들과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분야 협력을 논의했다. 하지만 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끌어내려면 민간 기업의 체면을 세워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마련된 무대가 총리관저였다. 일본 정부는 보조금 등 투자환경 조성을 약속하고 기업은 투자의사로 화답한다는 시나리오였다. 총리관저도 일본 정부가 일방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자리가 아니라 반도체 대기업들도 일본에 대한 투자의사를 밝히는 '윈윈관계'를 주문했다. 일본에서 반도체 사업을 신설하거나 확대할 가능성이 있는 기업 후보로 압축한 곳이 총리관저에 모인 7개사였다. TSMC과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각각 구마모토와 히로시마에 반도체 공장을 신설 또는 증설하고 있다. IBM과 벨기에 imec는 일본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와 제휴관계를 맺고 있다.

7개 기업 모두 일본 정부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정학적 위험이 낮은 지역에 생산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글로벌 반도체 대기업의 공통 과제가 됐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중국의 공급망이 단절될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산제이 마이크론 CEO는 "미일 관계가 강화되는 가운데 마이크론이 일본 투자를 결정한 시기와 맞물렸다"고 설명했다. 기시다 총리와 면담 사흘 뒤인 21일 중국 정부는 마이크론 제품의 중국 판매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면담 날짜도 연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고심한 결과였다. 18일은 주요 7개국(G7) 히로시마 정상회의(5월19~21일)가 열리기 하루 전날이었다. 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각국 정치가와 관료, 언론인이 일본을 찾는 시기에 일본 정부가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호소할 절호의 기회였다.

잘 짜여진 각본 속에 이뤄진 면담은 대성공이었다. 산제이 마이크론 CEO는 최대 5000억엔(약 5조원)을 투자해 2026년 가동을 목표로 건설 중인 히로시마 공장에서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팻 겔싱어 인텔 CEO는 이날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문부과학성 산하 이화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양자컴퓨터 기술을 연구하기 위한 각서를 체결했다고 전했다. 삼성전자도 300억엔 이상을 투자해 일본에 연구개발(R&D) 전용 반도체 생산라인을 건설할 계획을 밝혔다. 반도체 전문 시장 조사회사 옴디아의 미나미가와 아키라 선임 컨설팅 디렉터는 "일본은 정부의 대규모 지원과 엔화 가치 하락, 낮은 지정학적 리스크 등의 이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