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피란 1년] ② "소주보다 보드카가 더 잘 팔리는 동네"

고려인 동포 모여 사는 인천 '함박마을'·안산 '땟골마을'
우크라 전쟁 이후 고려인 피란민 밀려와…"종전 후에도 뿌리내리고파"

"러시아어를 어느 정도 해야 여기서는 장사를 할 수 있죠."
지난 16일 오후 인천 연수구 연수동의 '함박마을'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 모(54) 씨의 말이다. 약 10년 전 개업한 이씨의 가게에는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를 비롯해 중앙아시아에서 넘어온 향신료와 50도를 넘나드는 러시아산 보드카처럼 높은 도수의 주류로 가득했다.

이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인 손님은 조금씩 줄고, 고려인 동포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며 "그에 따라 상품 진열대의 풍경도 이국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과장 좀 더 보태면 소주보다 러시아산 보드카가 더 많이 나간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 곳곳에 들리는 러시아어…함박마을, 한국 속 중앙아시아
인천시에 따르면 함박마을은 외국인 거주 비율이 전체 주민 1만여명 가운데 외국인이 약 43%에 이르는 '다문화 마을'이다.

함박마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에서 온 고려인 동포다.

고려인단체들은 인천에 거주하는 고려인 동포 8천여명 가운데 약 5천명이 함박마을을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는 것으로 내다본다. 지난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한국을 찾은 고려인 피란 동포 중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며 그 수가 최근 들어 꾸준히 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 요리와 러시아 빵 등 이국적인 식료품점과 식당, 환전소 등 다양한 상점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함박마을 중심에 위치한 마리공원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중앙아시아 출신 여성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동네 곳곳에는 쓰레기 분리배출 안내문을 비롯해 식당 내 차림표 등도 러시아어로 병행해 써 붙였다.

마하이 마리나(39) 씨는 지난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피해 아이 둘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이후 뒤늦게 피란한 어머니와도 극적으로 상봉해 함께 산다.

그는 "과거 한국에서 7년 정도 일했던 경험이 있고, 친척도 살고 있어서 한국행을 택했다"며 "급여가 적긴 하지만 정규직으로 취업해 안정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잘 적응하고 있다"며 "여기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니 대학 교육까지 시키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 우크라 피란 동포의 정착지로 자리 잡은 땟골마을
17일 오후 약 7천여명의 고려인 동포가 거주하는 국내 최대 경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땟골마을의 모습도 비슷했다.

안산시 고려인문화센터와 고려인 지원단체 사단법인 '너머' 사무실이 있는 이 일대에는 원룸형 건물과 다가구 주택이 밀집해 있다.

이들 공간에는 일자리를 찾아 국내에 들어온 이주노동자와 가족들이다.

거주민 중에는 러시아권에서 온 고려인 동포들도 많은데, 우크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피란 동포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다가구 주택 사이로 서있는 전봇대 곳곳에는 세입자를 구하는 전단들이 붙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3월에는 이곳에서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센터로 이어지는 길목 한쪽의 빌라에서 불이나 나이지리아 출신 남매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모는 일곱 가족이 함께 살았던 집에 불이 나자 2살짜리 막내를 대피시켰지만, 거센 불길 속에 갇힌 나머지 자녀 4명은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최근 기자가 찾은 사고 현장에는 당시 화재로 타버린 잔해들은 치워진 상태였으나 그을린 벽면은 그대로 남아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불이 난 집 내부로는 인부 1∼2명이 오가며 수리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에서 활동하는 장 아나타시아 씨는 화재 현장을 함께 둘러보며 "이 빌라 안에도 불이 난 집을 제외하고는 고려인 동포 가족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우크라 전쟁이 난 뒤로 이쪽 골목에 고려인이 많이 늘었다"고 전했다.

김진영 인천상담소장은 "지난해 초부터 고려인 마을에 정착한 우크라 피란 동포 중 상당수가 종전 이후에도 한국에 살길 희망한다"며 "이미 한국에 친인척이 있고, 문화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은 덕분"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피란 1년이 지나면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식은 게 사실"이라며 "고려인 피란 동포가 안착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와 지자체, 민간 단체 등에서 꾸준한 애정을 보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