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땅에서 와인 한 잔

[arte] 문보영의 낯선 세계
오늘 만난 전화영어 선생님 클라리타는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나라인 벨리즈에 산다.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으로 근무 중인데, 출근 전 새벽 5시에서 7시까지 전화영어 선생으로 일하고 퇴근한 후에도 영어를 가르친다. 그녀의 또 다른 직업은 뮤지션으로, 그녀의 꿈은 돈을 모아 미국으로 가는 것이다.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앨범을 낼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벨리즈라는 나라를 처음 듣는 까닭에, 그녀가 사는 곳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더니 그녀는 자신은 작은 강 인근에 사는데, 그 강을 건너면 과테말라라고 했다.
‘아주 작은 강이고 깨끗해. 강물로 세수를 해도 될 정도야. 그런데 한국은 지금 새벽 아니야?’ 그녀가 물었다. ‘응, 맞아. 불면증이 있어서 늦게 자거든. 오늘도 잠이 안 와서 새벽 수업을 예약했어.’ 나는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벨리즈의 원숭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마을에는 깊은 숲이 있는데 검은 원숭이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검은 원숭이들은 낮에는 숲에서 지내고 어둠이 내리면 강으로 내려와 물을 마신다고 한다. ‘밤 11시가 되면 원숭이들이 내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려. 침대에 누워서 강물 소리와 원숭이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잠이 잘 와.’ 그녀는 말했다. 먼 타국에서부터 원숭이 소리와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녀의 잔잔한 묘사를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 ‘작은 분수를 구할 수 있다면 추천해.’ 그녀는 말했다. ‘우리 집에 스탠드 크기의 작은 분수가 있는데,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 아침에도 기분이 좋고, 잘 때도 기분이 좋거든.’ ‘고마워.’ ‘오늘 읽을 데일리 뉴스는 골랐어?’ ‘응.’
내가 고른 데일리 뉴스는 호주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IP라는 이름의 호주 여성은 빅토리아주를 횡단하던 중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곳은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진흙에 차가 빠져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술을 마셨다. 괜히 나가서 설치며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대신 와인 한 잔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녀가 가진 것은 엄마에게 주려고 샀던 새 와인 한 병이었다. 구조되기 전까지 그녀는 와인을 홀짝거리며 알딸딸한 상태로 버텼다. 거의 포기한 채로 그녀는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담긴 편지까지 써두었다. 천만다행으로 실종 5일 후 그녀는 헬리콥터에 의해 발견되었다. 구조 당시 IP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담배 좀…’이었다. 클라리타는 그 문장을 다시 읽으며 웃었다.

‘나라면 뭐라도 했을 텐데. 밖에 나가서 구조 요청을 한다든가, 아니면 걷거나.’ 나는 말했다. ‘길을 잃고 차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클라리타는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그녀가 차에서 벗어나지 않고 (허튼짓을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딱히 살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보다 수월하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노력을 안 하는 노력. 그게 그녀가 한 노력임.’ 클라리타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