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식탐탐] ⑨ 만년 2인자 보리의 반란 '색깔 보리'

농진청, '흑누리' 등 12개 품종 개발…보리밥 벗어나 새 소비시장 개척
베타글루칸 등 기능 성분 함량 높아 가공식품에 적합


[※ 편집자 주 = 각종 콘텐츠 플랫폼에서 '먹방', '맛집'이 주요 콘텐츠로 자리 잡으면서 먹거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요식업계는 자영업 태동기, 프랜차이즈 시대, 노포·맛집 유행기를 지나 이제는 어떤 식재료를 사용해 음식을 만들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식재료 시대'에 왔습니다.

연합뉴스는 농도(農道) 전북에 자리한 농촌진흥청과 함께 국내 우수 식재료(농축산물)와 가공식품을 중심으로 생산물, 생산자, 연구자의 뒷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또 현업에 있는 셰프와 식음업계 전문가들의 솔직한 식재료 리뷰를 담아내 소비자의 궁금증을 해소할 계획입니다. 코너 제목은 '좋은 식재료를 탐구하고 연구한다'는 의미로 호식탐탐으로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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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사라진 관용구이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한국인이 일 년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표현할 때 사용하던 말이다. 보릿고개가 고통스럽게 여겨지는 원인은 다름 아닌 배고픔이었다.

쌀이 넘쳐나는 요즘과 달리 지난 가을 수확한 쌀이 바닥나고 보리가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 보릿고개는 '배고픈 절기'로 기억됐다.

그래서 한자로는 춘궁기(春窮期) 또는 맥령기(麥嶺期)라고 불렸다. 이 보릿고개를 넘어서고 나서 주린 배를 달래줬던 곡식이 바로 보리다.

1960년∼70년대에는 쌀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혼분식장려운동까지 펼치면서 보리 소비량이 증가했다.

이 시기를 지나온 장년 세대는 강제 섭취를 한 탓에 자연스레 '보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됐다.

보릿고개와 혼분식장려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배경 탓인지 한국인에게 보리는 '쌀의 대체재', '곡물계의 2인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통일벼의 보급으로 1977년 정부가 '녹색혁명 달성'을 선언하면서 보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됐다.

1980년대에는 값싼 수입산 밀이 바꿔 놓은 한국인의 식생활로 인해 소비량이 급격히 줄면서 2인자의 자리도 밀에 넘겨줘야 했다.

마침내 2012년 정부는 수매를 중단했고, 보리 생산과 소비는 더 곤두박질쳤다.

통계청에 따르면 1970년 국내 보리 재배 면적은 83만3천㏊로 1인당 연간 보리 소비량은 37㎏에 달했다.

그러나 2022년 기준 보리 재배 면적은 2만2천㏊로 줄었고, 1인당 연간 보리 소비량도 1.6㎏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곡물로서 보리의 지위는 하와이대에서 발간한 <모럴 푸드>(2019) 속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인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곡물이었던 보리는 쌀의 대체재에서 새로운 가치를 지닌 매력적인 곡물로 변화하는 데 실패하면서 조용히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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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보리는 벼와 이모작하며 벼의 부족분을 채우는 역할로 언제나 쌀 증산에 종속된 곡물로 사고 돼 왔다"면서 "쌀 생산이 늘자 1970년대 말에는 보리 소비가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1980년대 중반이 되자 밥을 해 먹으려고 보리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어지는 수준까지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보리의 지위가 땅에 떨어졌지만, 보리는 인류 최초로 농업을 시작한 신석기 시기부터 재배된 세계 5대 식량 작물 중 하나다.

보리가 최초로 재배된 곳은 BC 7천년 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현재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을 거쳐서 이란 서부의 자그로스산맥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한반도에는 근동 지역에서 인도 인더스강 유역을 거쳐 중국 산간지를 통해 약 3천년 전 보리가 전파된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1976년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집터 유적에서 기원전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겉보리의 탄화 곡물이 출토된 바 있다.
농진청 연구진은 중요 작물인 보리의 자급률 확보와 부정적인 이미지 개선을 위해 신품종 개발에 나섰다.

연구진은 다이어트나 식이요법에 도움이 되는 기능성 곡물 수요 증가와 건강 기능 성분이 풍부한 식품을 찾는 소비자가 느는 추세에 초점을 맞춰 품종 개발에 매진했다.

수년간의 연구 끝에 2009년 청색보리인 '강호청'과 2011년 검정보리인 '흑누리' 등 다양한 색깔 보리 12개 품종이 개발됐다.

색깔 보리를 개발한 이미자 국립식량과학원 농업연구관은 "주식으로서가 아니라 가공식품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건강 기능 성분이 풍부한 색깔 보리를 개발했다"면서 "색깔 보리는 일반 보리보다 항산화 물질인 안토시아닌이 많이 들어 있고, 베타글루칸과 폴리페놀, 플라보노이드 등 기능 성분도 함량이 높다"고 설명했다.

색깔 보리에 많이 함유된 베타글루칸은 식이섬유의 일종으로 혈중 콜레스테롤 감소와 당뇨, 심장질환 예방에 도움이 된다.

겨울철 휴경지를 활용해 농사를 짓는 색깔 보리는 농가 수익 증대는 물론 재배 편의성 덕에 농가에서도 환영받고 있다.

고창에서 강호청을 재배하는 이기수(49)씨는 "색깔 보리는 계약 재배를 통해 재배하고 있다.

일반 보리보다 가격이 10%가량 높게 받을 수 있다"면서 "겨울철 논과 밭에 파종하기 때문에 농약 사용이 적어 재배하기도 편하고, 보리를 심으면 봄철 잡초 억제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색깔 보리는 쌀 대체재로 소비되던 보리와 달리 가공식품으로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다.

흑누리로 만든 보리 음료는 2017년 출시 후 4년 만에 누적 판매량 2억병을 돌파하며, 미국, 호주, 일본, 베트남 등에도 수출되고 있다.

강호청으로 만든 청색 보리 음료 역시 지난해 출시 1개월 만에 약 4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소비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

흑누리와 강호청은 아밀로스 함량이 높아 보리 함량 100%의 보리 국수 생산에도 사용되고 있다.

16년째 보리 가공업에 종사하는 김재주 농업회사법인 청맥 대표는 "2007년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국내 색깔 보리 생산량은 제로였다.

현재는 재배 면적 1천㏊에 생산량은 4천t 정도 수준으로 성장했다"면서 "가공식품 종류도 보리차부터 보리 커피, 보리 국수 등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 대표는 또 "이제는 보리밥으로 보리를 소비하는 시장은 한계에 다다랐다"면서 "보리 가공식품으로 새로운 보리 소비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색깔 보리를 이용한 가공식품이 다양해지면서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혀 줄 것으로 전망했다.

푸드라이터 정재훈 약사는 "식품에 매력적인 색채를 더하면 장 건강에 도움이 되는 식이섬유, 항산화 물질이 많이 함유돼 음료, 국수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공식품에 활용도가 높아 보인다"며 "보리 국수의 경우 색깔이 진해서 향이 강할 것 같지만, 막상 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밀가루면처럼 쫀쫀한 탄력이나 메밀면의 뚝뚝 끊기는 느낌의 중간 정도 식감이 재미있다"고 평했다.

그는 이어 "보리 국수는 비빔면이나 냉면을 색다른 느낌으로 만들어 먹고 싶을 때 활용도가 높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도움 주신 분들 : 박진우 농진청 홍보팀장, 김승호 주무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