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련함과 유머로 고별식 치른 '백발'의 에머슨 콰르텟 [클래식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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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 스트링 콰르텟의 라스트 댄스한국에서 열린 많은 클래식 음악 공연들 가운데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공연들을 손꼽아본다면 유독 현악 4중주단들의 마지막 공연들이 떠오른다. 스메타나 4중주단과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을 비롯하여 마지막 원년멤버인 발렌틴 벨린스키와 함께 한 보로딘 4중주단 등등 역전의 노장들이 보여준 마지막 내한공연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음악적인 감동 이상의 짙은 페이소스를 공연장에서 흩뿌린 바 있다.
이를 생각해 보면 수십 년 이상 그들이 함께 한 독보적인 앙상블과 긴밀한 호흡은 물론이려니와 그 시간에서 기인한 풍후한 음향과 핍진한 디테일의 조화에서 기인한 것일 것이다. 이렇게 젊은 실내악단들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음악적 감흥을 전달받았다는 점에서 현악 4중주단들의 ‘마지막’ 공연들은 한국 청중들에게 유독 각별하게 다가왔었다. 무려 47년 동안 앙상블을 이어왔던 에머슨 4중주단도 이 감동의 역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2023년 은퇴를 선언하며 비로소 그 큰 눈을 감고자 한국 공연에서는 ‘Last Dance’라는 부제를 달고 20여 년 넘는 오랜 시간동안 교감을 나누었던 한국 청중과의 이별을 준비한 것이다. 2023년 5월 27일 오후 5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 무대에 등장한 네 명의 음악가들. 그 동안의 시간을 대변해주듯 검디 검었던 그들의 머리카락은 어느덧 백발로 변해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린 파트를 담당해온 유진 드러커와 필립 세처는 창단멤버로서의 명예로움을 발산하며 첫 연주곡인 퍼셀의 샤콘느부터 강렬한 흡인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어 연주된 하이든의 현악 4중주 G장조 Op.33 No.5과 모차르트의 D단조 K.421은 상호 대비를 이루는 세트로서 에머슨 4중주단의 개성과 특징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특히 1부에서는 유진 드러커가 1바이올린으로 등장하여 음악을 주도적으로 리드했다. 그는 간헐적으로 음이 플랫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종을 울리는 듯한 청아한 울림과 카리스마 넘치는 투명한 음색을 흩뿌리며 전성기 시절의 그 전설적인 앙상블을 다시금 소환해냈다.하이든은 1악장에서 첼로의 유머러스한 표현력, 비애감과 우아함을 거친 뒤 전원이 스타카토로 종지를 찍는 여운이 인상적인 2악장, 쾌활함과 노련함이 어우러지며 극적인 전개를 거듭한 4악장이 인상적이었다. 모차르트는 긴 정적과 강렬한 효과의 대비가 인상적인 곡으로서 3악장에서의 불안감이 엄습한 듯한 음향과 피치카토 반주 위에 펼쳐진 감각적인 바이올린 솔로 멜로디의 대조, 변주의 다채로운 묘미와 비올라의 역할이 놀라움을 더했던 4악장이 깊은 감동을 주었다.
2부 베토벤 현악 4중주 E단조 Op.59 No.2에서는 필립 세처가 리더로 나서며 에머슨 특유의 변검과도 같은 새로운 드라마가 펼쳐졌다.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치밀하면서도 강력한 앙상블과 일체감 높은 표현력을 바탕으로 힘찬 1악장과 자조적인 2악장, 라주모프스키가 제안한 러시아 멜로디가 돋보이는 3악장, 쾌속의 템포에서도 여전히 정밀한 디테일과 원숙한 프레이징이 살아난 4악장이 한 숨처럼 지나갔다.현악 4중주단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음악이 바로 이런 경지일 것이다. 여운과 감동, 유머가 함께 어우러진 세 곡의 앙콜곡을 마지막으로 우레와도 같은 기립박수가 쏟아진 이 고별공연이야말로 에머슨 4중주단에 대한 예술적 각인으로 한국 청중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박제성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