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섬이 있다니" 감탄…세계적 거장, '신안'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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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억 제안 뿌리친 현대 미술 거장까지…아티스트가 주목한 곳“70대 도초도 할매가 꼭 외우고 싶었던 지 손목에 삐뚤 글씨로 써놨습디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이라고요. 앞으로 관광객들 많이 오면 설명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박우량 신안군수의 '원&온리' 전략
지방 소멸 막는 방파제 역할
'꽃의 섬'에서 '예술의 섬'으로
박우량 신안군수(사진)의 얘기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올라퍼 엘리아슨이 누구인가.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다. 그의 이름을 신안 외딴섬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줄줄 외운다. 엘리아슨이 내년 말 수국을 형상화한 ‘대지의 미술관’을 도초도에 설치할 예정이어서다. 2006년부터 (2006년 10월~2014년 6월, 2018년 7월~) 신안군수를 역임 중인 박 군수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잠시 착각에 빠진다. 열정과 아이디어가 실리콘밸리의 젊은 혁신가 뺨칠 정도로 뜨겁고, 풍부하다. 공무원의 생각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
‘천사(1004)의 섬’이란 차별화된 브랜드를 만들고, 신안의 유인도 74개를 꽃의 섬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그는 또 한번의 파격적인 시도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엘리아슨을 비롯해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야나기 유키노리, 마리오 보타(Mario Botta) 등 세계적인 거장들을 신안으로 불러들이면서 신안을 ‘예술의 섬’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꽃으로 내국인을 불러들였다면 이제 문화·예술로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인구 소멸 위기 1위, 재정자립도 꼴찌 수준인 신안의 대반전이다.
인구 소멸 막는 ‘히어로’ 군수
신안군을 예술의 섬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2012년 무렵부터 싹텄다. 그 해 2월 박 군수는 흑백 사진의 대가로 불리는 마이클 케냐를 신안군에 초청했다. 케냐는 장산도 월산 소나무숲, 흑산도 사리마을 앞 칠형제바위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 군수는 당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세계와 소통하려면 예술을 통해야겠구나”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때부터 박 군수와 신안군청은 예술로 도시 재생에 성공한 해외 사례를 샅샅이 뒤졌다. 영국 북동부의 작은 탄광 도시였던 게이츠헤드의 사례가 박 군수의 눈에 들어왔다.
영국을 대표하는 설치 미술가인 안토니 곰리는 소멸 직전의 게이츠헤드에 ‘북방의 천사’라는 거대 철제 조각상을 세웠다. 220t의 철근을 사용해 제작된 20m 높이의 조각상은 높은 언덕에서 마을을 굽어보며 관람자를 단숨에 압도한다. 덕분에 한때 탄광촌이었던 이 작은 도시는 세계적인 예술 도시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박 군수는 곰리의 작품을 신안의 섬에 들여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돈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 군수의 설명에 따르면 “곰리는 UAE(아랍에미리트)가 300억원을 제안했는데도 자신의 컨셉트에 맞지 않다며 거절했을 정도”로 콧대가 높은 작가다.
신안군청 직원들은 2018년 무렵부터 곰리측에 메일을 수도없이 보냈다. 한 번만 와서 신안의 섬을 봐달라고 간청했다. 간절함이 통했을까. 곰리는 비금도를 방문하곤 그곳의 명사십리 해변(사진)에 반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듯한 천연 그대로의 섬이 어떻게 이렇게 남아 있을 수 있냐”며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현재 곰리는 신안군과 작품 설계를 논의 중이다. 최종 계약이 성사되면 런던에서 작업한 후에 내년 봄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포스코가 40억원 어치의 철근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군 예산도 40억원 투입된다. 박 군수는 “물이 차면 바다속으로 들어갔다가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작품이 될 것”이라며 “안토니 곰리의 작품을 보기 위해 전세계 관광객들이 비금도를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좌도엔 물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의 플로팅 뮤지엄을 만들고 있다. 2007년 시작된 ‘이누지마 아트 프로젝트’를 주도한 일본의 야나기 유키노리가 설계를 맡았다. 이누지마는 1909년 세워진 구리제련소 덕분에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던 곳이다. 하지만 제련소가 문을 닫으면서 인구 55명, 평균 연령 73세의 섬으로 소멸 위기에 놓였었다. 야나기는 이랬던 이누지마를 나오시마에 버금가는 예술의 섬으로 변모시켰다.
자은도에 들어설 인피니또 뮤지엄은 마리오 보타와 박은선 작가의 공동 작품이다. 보타는 라움 미술관, 남양성모성지 등을 등을 설계한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다.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조각가 박은선은 올해 3월 ‘베르실리아의 명사’ 상을 한국인으로 처음 받기도 했다.
박 군수는 “광주 비엔날레 때 박근혜 대통령의 걸개 그림을 만들었던 홍성담 작가에게 신의도에 동아시아 인권평화 미술관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며 “24개 섬에 1도(島) 1뮤지엄을 만드는 것이 신안군의 최종 목표다”라고 설명했다.
“섬 사람의 자존감을 살리고 싶었다”
박 군수는 신안군 도초도 출신이다. 작은 섬마을에서 180㎝를 훌쩍 넘는 키에 깡마른 그는 유년 시절부터 특별한 존재였다. 마을 어른들은 도초의 초(草)를 면류관을 쓴 사람에 빗대곤 했다. ‘서울 같은 큰 물에서 놀아야 출세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목포교육대를 졸업하고 7급 공무원으로 공직에 입문한 박 군수는 내무부 장관 비서관 등을 거쳐 하남시 부시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퇴임했다.2008년 신안 군수에 당선되고 나서 처음으로 한 일이 신안하면 딱 떠오를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 나온 게 ‘1004의 섬’이다. 군수로 재직하면서 섬과 섬을 잇는 연륙교를 끊임없이 만들었다.
최근엔 ‘윤석열 대교’를 신안에 짓겠다고 발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장산도와 신의·하의도를 잇는 국도2호선 2.2㎞ 구간 연륙연도교의 가칭을 ‘윤석열 다리’로 해서 예타 면제 사업으로 건의하기로 한 것. 박 군수 특유의 실용주의가 진가를 발휘한 사례다.
당시 주변의 비판에 대해 박 군수는 이렇게 응수했다. “주민들 위해 2800억원 예산의 다리가 놓여진다면 제가 정치적으로 욕먹어고 비난받아도 좋다. 시장·군수가 선거할 때나 여당·야당이 있지 당선되면 오직 주민만 보고 일하는 것이다”
1954년생으로 올해 69세인 박 군수가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며 신안 살리기에 나서는 이유는 명확하다. “지방 소멸을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안을 세계인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는 “섬에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신안을 문화·예술의 섬으로 만들어 섬 살이의 자존감을 확실히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우량 신안군수
신안=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