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담쌓은 '말 없는 소녀'에게 행복한 비밀이 생겼다 [영화 리뷰]

'말 없는 소녀'
베를린 국제영화제 국제심사위원상 수상작
5월 31일부터 국내 개봉
침묵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비밀을 지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고, 반항을 내포하는 수동적 공격이기도 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시 <님의 침묵>에서 떠나간 인연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침묵으로 승화했다.

5월 31일 개봉한 영화 ‘말 없는 소녀’는 침묵을 지키는 아홉살 소녀의 이야기다. 그의 침묵은 어떤 의미였을까. 작품은 콤 베어리드 감독이 연출을 맡아 제7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국제심사위원상을 받았고, 지난 3월 열린 제95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우수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영화는 클레어 키건의 원작 소설 <맡겨진 소녀>의 전개를 충실히 따라간다. 코오트는 아일랜드 시골의 가난한 농가에서 산다. 부모의 따뜻한 관심과 애정은 바랄 처지가 아니다. 술과 경마에 빠진 아버지와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 어머니에게 코오트는 애물단지 같았다. 학교에서도 겉돌며 간단한 문장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 이래저래 코오트는 ‘말 없는 소녀’가 된다.
뭐하나 신나는 일 없었던 코오트에게 새로운 세상을 접할 기회가 찾아온다. 여름 한 철을 친척 킨셀라 부부 집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코오트는 친척 부부로부터 다정하다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낀다. 요리를 함께 하고 농장 일도 같이 한다. 시내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일상을 공유한다. 굳게 닫힌 코오트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물론 말이 갑자기 늘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입을 굳게 닫는 이유에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 소녀의 침묵은 냉랭한 주변 환경에 담을 쌓은 결과였다. 이제는 혼자서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비밀이 생겼다. 킨셀라 부부와 지낸 꿈같은 시간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느덧 킨셀라 부부와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끝났다. 킨셀라 부부가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차를 타고 떠나는 순간, 코오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코오트는 자신을 떠나가는 킨셀라 부부를 향해 있는 힘껏 내달린다.
주인공 소녀 역할을 맡은 캐서린 클린치의 호연이 돋보인다. 영화는 아이의 순수한 시선을 따라가면서 동심의 향수를 자극한다. 킨셀라 부부가 송아지에게 분유를 먹이는 모습을 보고 “송아지에게 소젖을 양보하고, 저희가 분유를 마시면 안 되나요?”라고 말하는 천진한 모습은 보는 이의 미소를 자아낸다. 영화 마무리에 친척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는 장면은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놓기 충분하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님의 침묵> 속 구절이다. 코오트는 과연 킨셀라 부부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말 없는 소녀의 침묵, 그리고 영화에서 여백으로 남겨둔 결말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95분. 전체관람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