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파국의 가장자리에 있다…내가 아스펜에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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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조진주의 로드 오브 뮤직미국 콜로라도주에 있는 아스펜이라는 소도시는 음악인들에게는 음악제로 더 많이 알려진 곳이지만, 실은 대표적인 미국 부호들의 겨울 휴양지다. 낮엔 스키를 타고 밤엔 하이엔드 문화와 쇼핑 등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할까. 록키산맥의 절경이 아기자기한 마을 분위기와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고, 투박한 산악지역의 건축물과 명품 상점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동화 속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항상 아스펜에서 여름을 보내는 선생님을 따라 나는 10대의 여름을 고스란히 아스펜에서 음악과 함께 보냈다. 이제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그때의 감각을 떠올린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 공기 중에 가득한 아스펜의 나무 냄새, 여름에도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산 공기, 밤하늘 가득한 별들 아래에서 가만히 걸어가며 나눠먹었던 피자와 맥주의 맛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때 그 곳에서 내가 수혈받았던 음악과 낭만의 정서 때문이다.10대 시절 나는 꽤나 음악에 미쳐 있었다. 악기를 조금이라도 더 잘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그냥 음악이 너무 좋았다. 봄의 제전을 외우고, 말러 교향곡을 끊임없이 들었다. 아마도 나를 그렇게 심포니 레퍼토리에 미치게 만들었던 요소 중 하나는 아스펜 음악제 예술감독이었던 지휘자 데이비드 짐만 선생님(사진)일 것이다.
천방지축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리허설 내내 떠들기 바쁜 어린애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운 좋게 음악제의 오케스트라 중 가장 정예 멤버로 이루어지는 챔버심포니에 배정 받는 호사를 7년간 누렸다. 챔버심포니는 짐만 선생님이 가장 많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이기도 했고 마치 실업 오케스트라처럼 매주 풀 프로그램을 연주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매주 줄리아 피셔, 엠마누엘 파후드, 조슈아 벨, 랑랑, 네빌 마리너 경, 리옹 플라이셔, 예핌 브론프만, 교코 다케자와 같은 엄청난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하며 그들의 음악을 스펀지 처럼 빨아들일 수 있었다.아스펜 음악제에는 총 4개의 오케스트라가 있었는데, 그 중 아티스트와 학생들이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챔버심포니가 있었다. 아주 큰 편성의 곡을 연주하는 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달리 챔버심포니는 주로 18세기, 그리고 19세기 초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이 시기의 곡, 그러니까 계몽주의 시대 (Enlightenment) 와 초기 낭만 작품들은 짐만 선생님의 주종목이기도 했다. 선생님 덕분에 나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베토벤, 슈만, 브람스, 멘델스존의 모든 교향곡을 연주했고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중요한 후기 교향곡들도 대부분 연주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로또 당첨같은 행운을 누린 것이다.선생님은 베토벤과 슈만을 연주할 때면 “바삭하게!(Crispy!)”, 그리고 “지휘봉과 동시에 소리내라(With the stick!)”이라는 주문을 하곤 했다. 말하자면, 망설이지 말고 모두가 대범하게 지휘봉과 함께 소리를 찍어내려야 한다는 주문이다. 지휘봉이 내려간 이후, 앙상블 내에서 소리를 잠시 모은 후 내는 방식으로 연주하면 고르지 않은 삐죽거림이 정화되고 깔끔한 소리를 내기가 더 쉬워지는 데도 말이다.선생님이 그렇게 주문한 이유는 간단하다. 소리를 내는 방식을 망설이게 되면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 즉 발음의 또렷함이 현저하게 뭉툭해지기 때문이다. 소리의 또렷함은 공기의 농도를 뚫는 화살촉이 되어, 듣는 이의 귀속으로 초스피드로 직진할 수 있는, 음악의 최고 무기가 된다. 우리의 감각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여 바로 그 순간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감적으로 공기의 떨림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그런 소리가 되는 것이다. 제대로 만든 소리는 그런 것이란 사실을 그는 항상 강조했다.
대조적으로 그의 음악적 해석은 때로 조금 심심하게 시작하는 듯하기도 했다. 첫 비트만 굉장히 섬세하게 작은 움직임으로 얹은 다음,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계시기도 했다. 지휘자가 모든 비트를 주지 않으면 연주자들은 굉장히 긴장하게 된다. 스스로의 소리에, 그리고 앙상블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주어지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굉장히 소극적으로 연주하게 되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엔 악기 간의 박자가 완전히 떨어져 나오기도 한다. 한마디로 '대환장 파티'가 될 수 있는 위험 천만한 연주 방식이다. 하지만 지휘자 니콜라우스 하르농쿠르도 이야기하지 않던가, “아름다움은 파국의 가장자리에 있다”고.이렇게 조심스럽고 슴슴한 이야기의 농도가 곡의 전개와 함께 짙어져 어느샌가 우리의 컨트롤을 넘어 짜릿한 절정으로 모두를 이끄는 그의 방식으로 연주하고 나면 무대와 객석엔 전기가 찌릿찌릿 흐르는 듯했다. 입을 뗄 수 없는 그 압도적 전율이란! 마치 베토벤이 그 공간을 포옹으로 꽉 감싸고 있는 듯한 감동이다. 말 한마디 없이 음악의 이야기로 모두가 하나 되는 순간, 그 순간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짐만 선생님께 배운 가장 큰 레슨이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오래동안 추구해온 연주의 방식이기도 하다. 어쩌면 조금 구식의 연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매순간 화려한 광고처럼 모두를 매료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싶지 않다. 모든 순간이 멋지다 못해 지루해지는 그런 매끄러운 연주보다는 중요한 한 순간, 중추의 쾌감과 마음의 감동이 강력하게 전달되는 연주를 해내고 싶다.
매초 소리의 촉이 생동감과 활력으로 가득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 물론 이런 연주는 연주자의 입장에서 상당히 위험하다. 미세하게 소리를 계속해서 찾아내는 작업을 연습실에서 뿐만 아니라 관객 앞에서도 해내야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주자가 숙련된 동작을 단순 실행하는 바로 그 순간, 소리는 단번에 그 빛을 잃는다. 동시에 음악의 맥박도 사라진다. 연주자가 본인의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 순간, 음악은 죽은 음표로 가득한 소음이 되고 만다. 이렇게 시끄러움으로 가득한 연주를 듣고 나오는 날에는 머리가 딩딩거리며 아프니 나는 평생 위험하게 살아야 하는 팔자임에 틀림없다.짐만 선생님이 오래 예술감독으로 지냈던 톤할레 심포니의 음반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추천하고 싶다. 특히 베토벤과 슈만의 교향곡들은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범고래 같이 활력이 넘친다. 100개가 넘는 앨범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기에 전곡 앨범을 두개나 한꺼번에 추천하는 실례를 범하고 있지만, 살아있는 음악의 낭만에 흠뻑 빠지는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니 긴 시간을 내어 함께 해 보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