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도 악마의 바이올린처럼 - 故 권혁주 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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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사진작가 구본숙의 ‘Behind the scenes’ (3)2016년 가을의 어느 날, 뉴스에서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했다. 권혁주 바이올리니스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정신이 얼떨떨했고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악의에 찬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 가서야 이것이 현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또래 되는 30대 초반의 음악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메어왔다. 예기치 않은 죽음은 낯설다. 그렇지만 죽음은 언제나 늘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죽음을 아무리 외면하더라도, 죽음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10월 15일 이른 새벽에 유가족들은 광화문 K아트홀 무대 위를 영정사진을 든 채 한 바퀴 도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받은 수많은 기립박수와 우리에게 전해준 전율을 기억하게 해주는 멋진 엔딩 의식이 아닐까 싶었다.“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다.
순간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끼고, 순간순간에 새롭게 피어나라.
(중략) 과거의 좁은 방에서 나와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 것처럼 살자.”
법정 스님의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에서 가져온 글이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권혁주만큼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 것처럼’ 살았던 이는 없었다. 나름대로 공연계에 몸을 담으면서 접했던 권혁주의 연주 스케줄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이동과 연주가 가능할까 싶었다. 대단하다고 경탄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긴 했는데, 그때마다 젊으니까 저럴 수 있는 거라고 무심하게 넘기곤 했었다. 실제론 그렇지 않았음을, 그게 감당할 수 있는 짐이 아니었음을 그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매일 열정을 불사르고 나서 얼마나 에너지가 남았으며,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시간과 여력이 얼마나 남았을까 싶다.
고인을 떠나보내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언제라도 곧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수줍음 많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장난기도 있었던 사람이라 이 모든 것이 그냥 짓궂은 장난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권혁주는 낯을 가리며 말도 차분하고 조곤조곤히 했지만, 가끔 기발하거나 엉뚱한 말을 해서 폭소를 터뜨리게 하기도 했었다. 이런 그를 다시 보고픈 마음 때문에 별생각을 다 했던 것 같다.그러나 그는 수많은 콩쿠르 우승으로 증명된 실력이 말해주듯 무대에 오르면 180도 변신했다. 음악을 할 때만은 더없이 진지하고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연주 또한 놀라운 수준이었다. 정확하면서도 화려한 그의 연주는 파가니니를 연주할 때 특히 빛을 발했다. 나는 아직도 권혁주를 떠올리지 않고서는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를 들을 수가 없다.
권혁주는 러시아에 입국할 때마다 자신의 과다니니 파르마 바이올린(1763년산)을 촬영해서 프린트해야 한다고 내게 의뢰하곤 했다. 입국심사 때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음반용 프로필을 촬영할 때는 K문화재단에서 의상을 준비해주었다. 천재는 미움받기 쉽다고 하지만 권혁주는 아니었다. 이 천재는 모두에게서 사랑받았던 것이다. 이때 촬영한 사진은 그의 마지막 음반 커버가 되어버렸다.2011년에 그의 프로필을 촬영하던 도중 그의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서 내가 찍어준 사진을 보았다. 음악가는 자신의 악기 케이스에 손수건이나 엽서 등 자신이 특히 아끼는 물건을 함께 넣어두곤 한다. 아이들에게 애착 인형이나 애착 담요가 있듯이, 누구나 애착하는 소품이 한둘은 있는 것 같다. 권혁주의 경우에는 그것이 내가 찍어준 사진이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보니 가슴이 흐뭇해졌고, 그래서 한 컷 찍어두었다.그해 즈음인가 음반용 촬영 작업을 마치고 여러 명이 광화문에서 맥주를 마시고 나서 흥이 올라 다 함께 노래방을 갔다. 세종문화회관 옆 작은 먹자골목 안에 자리잡고 있는, ‘첼로’라는 뜬금없어 보이는 이름을 지닌 노래방이었다. 이날 권혁주는 특히 신이 나 보였다. 그가 노래방에서는 뭘 부를까 평소 궁금해했던 내게 그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권혁주는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림프 비즈킷(Limp Bizkit)이라는 그룹을 특히 좋아했다. 이름만큼이나 괴짜 같은 뉴 메탈(힙합, 록, 메탈을 혼합한 장르) 밴드로, 서태지도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는 힙한 밴드였다. 노래방에서 그 밴드의 곡들을 엄청난 성량과 함께 괴성을 지르며 노래하는 권혁주의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운 외계인 같았다. 그의 이런 모습을 접한 사람은 몇 명 안 될 것이고, 나는 그 운 좋은 소수 가운데 하나다. 파가니니를 능란하게 연주해내던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악마의 밴드 보컬로 변했던 그 모습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도 좋을 장면이련만, 다시는 그럴 기회가 없다는 게 못내 아쉽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불사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성악가나 가수와는 달리 목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노래방에서는 그렇게 괴성을 지르며 날뛰다시피 했던 게 아닐까. 어쨌든 그는 이렇게 주변의 친한 지인들에게는 평소와 다른, 생경하면서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런 기억보다 오래 남을 것은 역시 그의 음악이다. 그의 짧은 삶을 애달파하는 것도 좋지만, 그가 그 짧았던 삶을 바쳐 세상에 남긴 것을 돌아보는 게 더 그를 아끼는 일일 터이다.인생은 카메라 워블링(초점을 잡을 때마다 렌즈가 움직이면서 장면이 흐려졌다가 선명해지는 것을 반복하는 현상)처럼 흐린 날과 맑은 날이 반복하는 것일진대, 그런 인생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유산을 남긴다면 그것에 만족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故 권혁주의 아름다운 연주를 경탄하며 다시 한번 진정으로 애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