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부르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

[arte] 임성우의 클래식을 변호하다
최근에 예술의전당에서 구자범이 지휘하는 ‘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공연이 있었습니다. 이 공연은 한동안 무대에서 보기 힘들었던 구자범 지휘자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우리말 가사로 번역해 무대에 올린 것이어서 이모저모로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번에 연주를 맡은 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이름이 좀 생소한 단체인데, 듣기로는 국내의 여러 상설 교향악단의 일부 악장과 단원들이 우리말로 부르는 합창 교향곡 이벤트 연주를 위해 모였다는군요. 합창단으로는 국립합창단, 서울시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등에다 아마추어 단원도 50명이나 있는 참 콰이어까지 모두 수백 명의 단원들이 공연에 참여하였습니다.텅빈 무대와 합창석에 조명이 들어오자 수백 명의 합창단원이 차례대로 나와 합창석을 가득 채웠고, 이후 ‘오케스트라 입장’이라는 소리가 무대 뒤에서 들리더니 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날 공연에서는 특이하게도 솔리스트들이 지휘자와 함께 나와 객석에 인사를 한 후 무대 왼쪽 구석에 준비된 의자에 앉더군요.

구자범 지휘자가 솔리스트들과 같이 무대에 등장하자 객석에서 통상의 경우보다 더 큰 열광적인 함성이 나왔습니다. 그 환호성은 좀 특이하여 평소 공연장을 많이 찾는 음악애호가들이라기보다 뭔가 다른 이유로 그를 지지하는 분들이 많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살짝 받았는데요. 공연이 진행되면서 저의 감이 빗나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느꼈네요.
이윽고 1악장의 연주가 시작되었는데, 악보상 여리게 시작하여야 하는 호른의 소리가 예상보다 커서 놀라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는 안정적인 출발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호른의 울림과 함께 제2바이올린과 첼로가 연주하는 잘게 쪼개진 여섯잇단음들은 하나의 모티브와도 같이 1악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인데 거의 들리지 않는다던가, 5도 하행 음형에 이어 마치 그에 저항이라도 하듯이 울리는 붓점 리듬에 의한 동기에서도 날카로운 리듬감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등 처음부터 이날 오케스트라의 음향 밸런스에 관한 구자범 지휘자의 접근 방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즉 이날 연주에서 구자범 지휘자는 마치 제1바이올린에 치중하여 연주되는 현악4중주처럼 주요 멜로디 등은 충분히 (심지어 루바토까지 가미하면서) 강조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오케스트라의 내성부 등 다른 파트의 울림들은 상당수 희생해 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뼈만 많고 살코기가 별로 없는 감자탕을 먹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1악장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재현부에서도 팀파니의 강한 가격, 관악기까지 힘차게 가세한 독특하고도 인상적인 저음 파트가 쾌감을 주었지만, 역시 음향의 디테일은 좀 아쉬웠습니다.

전반적으로 루바토를 많이 활용한 악상의 전개 자체가 최근의 연주 경향과는 다소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 보였습니다. 특히 템포를 잔뜩 늘어뜨려 서서히 시작하는 1악장의 마지막 코다는 이전의 올드 스쿨의 낭만적인 해석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오케스트라가 상당한 인템포로 1악장을 매듭짓자 뜬끔없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는데, 아마도 객석의 상당수가 베토벤 음악을 좋아해서 오신 분들이라기보다는 어떤 소속 단체에서 나눠준 표를 받고 이 한글로 된 합창 교향곡 이벤트를 응원하려 오신 분들로 채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습니다.갑작스런 박수에 구자범 지휘자도 당황하였는지 한 동안 포디엄 위에서 다리를 꼬고 객석의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린 후 2악장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어진 2악장에서도 (지휘자가 1악장 이후 보낸 암묵적 신호에도 불구하고) 객석에서는 또 1악장과 마찬가지로 박수가 쏟아졌고, 조용히 마무리된 3악장 이후에도 또 객석에서는 박수가 나와 어색한 순간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아무튼 그 후 드디어 이번 공연의 특징으로 소개된 우리말로 노래하는 4악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4악장 역시 악보상으로는 프레스토 템포임에도 구자범 지휘자는 낭만적인 종래의 해석의 전통에 입각하여 아주 느리고 장중하게 풀어나갔습니다.

이윽고 환희의 송가’ 주제가 첼로 등 저음현에 의해 울리기 시작했는데, 비록 베토벤이 지정한 템포와는 달리 좀 꿈떴지만 구자범 지휘자는 나름대로 선율의 음영과 굴곡을 잘 조탁해 내었습니다.

이렇게 점점 환희의 송가의 흐름을 타고 발전해가던 오케스트라가 공포의 팡파레에 의해 멈추고 드디어 우리말 가사에 의해 베이스가 “오 벗이여, 이런 소린 그만! 이제 우리 참 목소리를 내보세, 더 자유롭게”라고 외치면서 성악이 오케스트라에 가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베이스 솔리스트가 무대 좌측에서 마치 연극배우처럼 제스쳐를 쓰면서 한글로 외치는 이 레치타티보는 생각보다 근사하였습니다. 늘 듣던 독일어 가사가 아니어서 생소하기는 했지만 (이 교향곡을 들으면서도 독일어로 된 가사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온 많은 분들에게) 우리말로 직접 부르는 노래를 통해 그 뜻을 전달한다는 시도는 참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불리워진 ‘환희의 송가’의 우리말 번안 가사의 내용에는 고개가 갸우뚱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선, 구자범 지휘자는 ‘환희의 송가’가 마치 보수 반동세력에 대한 혁명과 투쟁을 선동하는 시(詩)인 것처럼 전제하고, Freude(환희, 기쁨)가 사실은 Freiheit(자유)를 몰래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1절을 “자유, 삶의 참 빛이여! 하늘 고운님이여! 우리 가슴 불에 취해 그 빛 따르나이다!”라고 합창단이 노래하게 했습니다.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서 Freude(환희, 기쁨)가 Freiheit(자유)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종래 일각에서 있기는 하였지만, 이는 사실적 근거에 의해 입증이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러의 시 <환의의 송가>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선인과 악인의 구분 없이 서로 형제처럼 지내는 보편적인 인류애와 기쁨을 노래한 것일 뿐, 어떤 특정 정치체제에 대한 투쟁을 선동하는 내용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실러나 베토벤이나 모두 프랑스 혁명이 내건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에는 큰 매력을 느꼈지만, 그것이 특정 정치세력의 야심으로 이용되거나 계급투쟁적 성격으로 변모되는 것에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구자범 지휘자는 자유라는 것이 주는 정치적 함의에 너무 몰입하다보니 사랑스런 여인을 얻은 자의 기쁨을 노래하는 2절 또한 ‘자유로울 인간의 자격 공표’라고 명명하면서 “나의 얼은 내 것이요 라고 말할 자만 남고 나머지는 떠나라”라는 뜻으로 번역을 하는가 하면, 3절은 “뭇사람들 자유 찾아 장밋빛을 따르나, 무릇 자유 향한 길은 핏빛임을 아노라! 받은 것은 술과 사랑, 죽음 견딜 벗 하나, 헛된 욕망 다 버리고 인간답게 서리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환희의 송가> 3절은 아래와 같이 선인과 악인을 불문하고 모든 피조물에게 어떤 형태로든 평등하게 허락된 행복과 즐거움을 노래하는 내용인데, 이것을 무슨 투쟁을 위한 핏빛 길을 제시하는 내용처럼 설명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많이 나간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Freude trinken alle Wesen
모든 존재는 기쁨을 마신다
An den Brüsten der Natur;
자연의 품 속에서
Alle Guten, alle Bösen
모든 선인도 모든 악인도
Folgen ihrer Rosenspur.
그가 선물한 장미의 오솔길을 걷는다
Küsse gab sie uns und Reben,
그는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나무를 주었고
Einen Freund, geprüft im Tod;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었다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쾌락은 벌레에게조차 주어지며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또한 그룹은 신 앞에 선다.

구자범 지휘자는 마지막 두 행에서 쾌락은 벌레에게나 줘버려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또는 인간답게 설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선과 악의 구분, 그리고 핏빛 투쟁 등은 실러 시의 내용에서 찾기 어려우며 오히려 벌레와 같은 피조물도 즐거움을 느끼고 천사들 또한 신 앞에서 환희를 느낀다는 것을 시적 운율에 맞춰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베토벤 역시 이 <환희의 송가> 3절 주부를 바탕으로 가사에 담긴 기쁨과 쾌락을 표현하듯 관능적으로 꿈틀거리는 현악기의 트릴을 배경으로 남성 솔리스트, 알토, 소프라노, 합창 등이 순차적으로 가세하면서 전체 성악 및 기악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거대한 음악으로 발전해나가다가, 급기야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Vor Gott)”가 여러 번 크게 강조되어 외쳐지면서 그 기쁨과 환희가 절정에 도달하도록 설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자범 지휘자는 신 앞에서(Vor Gott) 느끼는 강렬한 기쁨과 행복을 노래한 이 부분을 ‘헛됫 욕망 다 버리고 인간답게 서리라!’라는 설교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사실 이 3절의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현악기와 일부 목관과 금관, 그리고 저음현들이 (신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그룹들의 기쁨을 표현하듯)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떨며 격렬히 하행음형을 연주하는 부분은 참으로 인상 깊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날 연주에서는 초대형 합창단을 통해 어떤 정치적, 사상적 의미를 드러내고 전달하는 데 치중하다보니 그러한 인상적인 관현악의 음형이 합창 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것이 참 아쉬웠습니다.
아무튼 ‘헛된 욕망 다 버리고 인간답게 서리라!’라는 선언이 합창단에 의해 울리자 어처구니 없게도 객석에서 또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그분들은 자막을 통해 전달된 우리말 메세지에 적극 동의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 수 있겠지만, 이 정도가 되면 관객도 거의 테러 수준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후 이어진 행진곡도 무슨 전투를 앞둔 출정인 것처럼 자막이 뜨고, 또 그에 이어지는 푸가는 ‘투쟁’으로 묘사하더니, 마지막 환희의 송가는 ‘승리의 찬가’로 명명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대형 합창단에 의한 그 ‘승리의 찬가’라는 우리말 노래는 군가처럼 우렁차게 불리워졌으나, 그 소리에 묻혀 오케스트라의 섬세한 음향을 음미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고는 장엄한 안단테 마에스토소가 이어졌는데, 여기서도 ‘포상으로 마법이 이뤄지는 자유의 성소’라는 설명 하에 실러 시의 내용에서 ‘신(Gott)’을 ‘자유(Freiheit)’로 모두 치환해버린 번안 가사가 끝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마지막까지 거대한 합창단의 소리와 큰북까지 동원한 타악기의 굉음을 중심으로 한 음악이 지속되었는데요. 우리말로 불리워지는 노래였지만 솔직히 그 딕션 등을 통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는 힘들었고 내용은 여전히 자막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인류와 신이 만나는 이중 푸가 이후 독창자들에 의해 곧 화려한 축제와 같은 4중창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갑자기 중간에 곡이 엉키버리고 말았습니다. 지휘자가 급거 이를 중단시킨 후 다시 처음부터 중창을 전개하는 아찔한 순간이 발생하여 흥분된 축제의 분위기를 띠는 후반부가 시작부터 크게 흔들리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코다를 향하면서 대규모 합창단이 큰북 등 타악기 중심으로 몰아붙이는 거대한 노래 소리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구자범 지휘자는 그 특유의 루바토로 이 곡의 거대한 클라이맥스를 큰 그림의 측면에서는 잘 구축해내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예술의전당 2층 C구역 앞자리에서 듣는 음향은 (거대한 합창 소리에 오케스트라의 디테일은 다 묻혀버리기는 했으나) 상당히 압도적이었습니다.곡이 끝나자 객석에서 열광하는 함성이 쏟아져나왔는데, 아마도 이 곡을 처음 듣거나 들어도 독일어로 된 가사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채 들어오다가 이번 공연처럼 우리말로 (비록 원래의 가사와는 거리가 많지만) 가사가 제시되자 특히 그 가사의 내용이 그 분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 일으킨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다소 편향된 우리말 번안 가사를 통해 오히려 이 위대한 작품에 대한 많은 분들의 시각이 한쪽으로 고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상과 같이 ‘내돈내산 리뷰어’의 입장에서 이날 공연에서 느낀 점을 여과 없이 소개드렸습니다만,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번 우리말 가사에 의한 ‘합창’ 교향곡은 그 자체로 나름 참신한 기획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쪼록 이번 공연이 위대한 인류문화의 유산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다양한 논의와 해석들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