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 : 영국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드레서의 1877년 일본 방문
입력
수정
[arte] 조새미의 공예의 탄생(3)
시간 여행자 : 영국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드레서의 1877년 일본 방문인력거를 탄 크리스토퍼 드레서, 일본, ca. 1876-1877, 메리 애반스 사진 도서관 소장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현대적인 미감의 금속과 도자 제품이 생산되었다.
이 제품을 디자인했던 사람은 영국 식물학자, 디자이너, 교수, 조형가였던 크리스토퍼 드레서(Christopher Dresser, 1834-1904).절충주의와 미술공예운동의 열기가 만연했던 19세기 말 영국에서 어떻게 구조와 기능에 집중하는 이런 산업 제품이 생산될 수 있었을까? 이 디자인에 1876년 12월부터 1877년 3월까지 드레서의 일본 여행이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드레서는 어떻게 이런 특별한 여행을 하게 된 것일까? 그는 일본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귀국 후 작업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1873
드레서는 산업혁명의 절정기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모더니즘에 관한 논의가 진행될 즈음 사망했다. 그는 13세 되던 1847년, 런던에 위치한 공립 디자인학교 (Government School of Design)에 입학했다. 영국 산업 미술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이 학교에서 드레서는 7년간 수학했고, ‘디자인 개혁’에 의한 새로운 교육의 수혜자가 되었다. 하지만 드레서는 언제나 무엇을 하던 선례가 없던 일에 직면했다.일본 도자기를 그린 수채화, ca. 1876-1877, 크리스토퍼 드레서를 위한 디자인 앨범,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소장당시 드레서는 식물학으로 독일 예나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에 관한 책도 출판했다. 그가 졸업 후 모교에서 맡았던 강의도 식물학에 기초한 드로잉 수업이었고, 그의 스승이었던 오웬 존스(Owen Jones, 1809-1874)의 『장식의 문법 The Grammar of Ornament』에서도 식물과 관련된 내용을 드레서가 집필했다. 그런데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 일본관 관람 후 드레서는 디자이너로 경력을 전환하게 된다. 박람회에 전시된 사물들은 주일 외교관이었던 러드포드 알콕(Rutherford Alcock, 1809-1897) 경이 일본에서 수집해 온 도자기, 칠기, 금속기 등의 공예품이었다. 드레서의 일본 예술품에의 관심은 이와쿠라 사절단의 런던 방문으로 증폭되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Meiji Ishin)으로 근대 국가 구축을 목표로 급속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고, 1871년, 40명 이상의 외교관, 정치인, 학생 등으로 구성된 외교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미국에서의 7개월간의 일정을 마치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상륙했고, 영국 각지의 공장을 시찰하며 대량생산 시스템에 주목했다. 이와쿠라 도모미(岩倉 具視, 1825-1883)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 利通, 1830-1878)는 일본의 산업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영국 정부에 1873년 런던 국제 박람회에 일본 전시관을 확대해 줄 것을 제안했고, 드레서가 조력자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또한 드레서는 1873년 런던 북쪽에 위치했던 다목적 공간 알렉산드라 공원(Alexandra Park) 내 일본 마을 조성 감독으로도 일했는데, 일본식 정원, 가옥 등을 설치해 차 문화, 전통 공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행사와 전시도 기획, 개최했다.
머나먼 일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와 같은 문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와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등과 같은 화가들이 일본 예술품을 영감 삼아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그들 중 살아서 일본에 직접 가본 이는 거의 없었다.1876년 10월 5일, 42세의 드레서는 유서를 작성한 후 리버풀에서 뉴욕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10월 30일, 미국 필라델피아에 도착, 자신의 디자인한 벽지, 도자기, 카펫 제품을 전시하고 있었던 국제 박람회를 시찰하고, 미국 청중을 위한 세 번의 강연도 진행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철도로 이동해 시카고를 거쳐 11월 27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두 명의 일본인 수행원을 만나 일본행 배에 올랐다. 태평양을 건너는 데는 약 한 달이 소요되었다. 1876년 12월 26일, 집을 나선 지 약 석 달 만에 드레서는 목적지인 요코하마 항에 도착했다, 그는 멀리 보이는 후지산 형상에도 감정적으로 동요했고, 안개 낀 풍광을 용의 보금자리에 비유하는 등 미지의 세계에 들어선 순간의 설렘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첫 숙소는 동경 그랜드 호텔이었는데 유럽식이었고, 아침 식사도 빵과 마멀레이드가 제공되었다.대서양 횡단 증기선 아이다호, 1874 출처: 위키피디아
둘째, 미국 티파니社 (Tiffany & Co.)를 위한 일본 예술품 컬렉션 구입 대행을 위해서였다. 드레서는 미국 여행 중 티파니 (Charles Lewis Tiffany, 1812-1902)와 그의 아들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 1848-1933)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티파니社에서는 1810년경부터 일본풍 은기 제품을 생산했는데, 이를 더 발전시킬 다양한 일본 은제 공예품 원본이 절실했다. 드레서는 1877년 봄, 8,000점 가까운 일본 공예품을 뉴욕 티파니 본사로 보냈다. 드레서가 보낸 일본 공예품은 18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유행했던 일본풍 제품 생산의 기폭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드레서는 사우스켄싱턴 뮤지엄이 도쿄 국립 박물관에 기증한 유럽 장식 미술품을 전달하는 임무도 수행해야 했다.
이렇듯 드레서의 일본 방문의 본질은 제품 생산을 위한 샘플 컬렉션과 공예산업 시찰 및 교류로 볼 수 있다. 드레서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자신과 동행할 수 있는 전문 사진사와 드로잉을 할 수 있는 화가를 물색했다. 그 결과 공방 시찰 과정에서 찍은 1,000여 장의 사진과 수채화로 제작한 패턴 묘사 및 공예품 그림을 수많은 공예품과 함께 런던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놀랍게도 드레서는 일본이 1854년 개항한 이래로 일본 전역을 여행했던 최초의 서양 디자이너였다. 일본은 드레서에게 준공무원 권한을 부여해 줬고, 나라, 교토 등에 위치한 황제의 개인 소장품도 실견할 수 있는 특혜도 주었다. 드레서의 일본 여행에는 두 명의 젊은 일본인 관료가 동행했다. 하나는 1873년 런던 국제 박람회의 일본관 구성을 위해 런던에서 교류했던 인물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시다 타메타케(Ishida Tametake)였다. 일본 정부는 이시다에게 드레서의 여행이 일본 산업에 끼칠 영향에 관해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고, 이는 『드레서 호코구 Dresser Hokoku』 라는 제목으로 1877년 출판되었다.
드레서도 일본에서의 경험을 기술한 저서 『일본의 건축, 미술, 그리고 공예 제조업 Japan, Its Architecture, Art, and Art Manufactures』을 1882년 출간했다. 이 책은 영국의 산업 미술과 일본의 공방 공예의 상호작용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일정 변화에 따른 여행기 형식으로 건축물의 구조와 장식에 관해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후반부는 칠기 공방, 도자 공방, 금속 공방, 직물 공방 등 일본의 소규모 제조업 견학을 토대로 특정 공예품의 성격을 분석하고, 제작 과정에서 관찰했던 내용을 적었다. 드레서는 도자 공방만 무려 68곳을 시찰했으며, 일본 도자에 끼친 조선과 중국 도자 문화의 영향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예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자라고 설명하는 내용도 기술했다. 드레서는 비대칭 구조와 자연법칙을 중시한다는 점을 일본 장식미술의 특징으로 분석했다.
미래에서 온 디자이너
찻주전자,ca. 1879, 제임스 딕손 앤 손스 社(제조),크리스토퍼 드레서(디자인),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소장당시 영국의 산업 미술품 제조회사에서는 일본의 공예품을 모방해 대량 생산한 제품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드레서는 이러한 일본풍 디자인 생산에 머무르지 않았고, 일본 공예품과 건축에 드러나는 단순한 아름다움의 원리를 파악해 산업 제조 과정에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일본 여행 후 드레서의 디자인에서는 대담한 창의력을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제임스 딕슨 앤 손스(James Dixon & Sons)에게 판매했던 37 종류의 찻주전자 디자인과 린소프 예술 도자 회사(Linthorpe Art Pottery)를 위해 디자인했던 도자 디자인이다. 재료와 형태의 관계와 같은 본질적인 부분에 집중한 이들은 완벽하게 추상화된 형태를 표현하는 급진적 디자인이다.
특히 제임스 딕슨 앤 손스社 금속 제품은 간결한 직선과 각진 모서리와 같은 디자인 요소로 용기의 구조를 강조했고, 손잡이와 주구의 위치와 길이를 고려해 기능적 문제를 해결했다. 표면 처리에 있어서는 니켈 도금, 에나멜 코팅, 은도금 등과 같은 당시의 혁신 기술도 적용했다. 장부에 ‘영국식 일본(English Japanese)’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본 영향이 적지 않음도 유추할 수 있다. 제작 공정의 효율성 및 비용 절감으로 대량 생산된 일부 디자인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당시로서는 드물게 4,000세트 이상 판매되기도 했었지만, 또 다른 일부는 대량 생산하기에 비용 면에서 비효율적으로 판단되어 모형으로만 존재한다. 그의 시도가 너무 시간을 앞서 있었던 것일까. 드레서는 재정 문제와 건강 악화로 사업을 이어 가기 어려워졌다. 1883년을 기점으로 영국과 일본에 걸쳐 있던 드레서의 주요 회사가 부도 처리되고 물품이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 1904년 사망 후 두 딸이 가업을 물려받았지만, 드레서 없이 사업을 유지할 수 없었고, 20세기 중반까지 그의 업적에 관한 연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드레서는 거의 모든 행보에서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떠남에 두려움이 없었을까.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도착하기까지만 거의 석 달이 걸렸던 일본 여행. 그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일본 공예품들은 드레서에게 과거의 물건으로 보였을까 아니면 미래의 물건으로 보였을까. 1877년 드레서의 일본으로의 여행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타임머신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