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청춘 영화 <바보들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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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대건의 소설처럼 영화읽기한창 영화와 사랑에 빠져 영화를 많이 보던 20대 초반, 나는 청춘영화 강국 일본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1975년 제작된 한국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우연히 본 뒤로는 그런 부러움이 한번에 사라졌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청춘영화가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철학과에 다니는 병태와 불문과에 다니는 영자의 약속 없는 연애담’이라고 요약할 순 있으나, 영화의 다양한 면모를 전하기 어렵다. 영자는 병태에게 “철학과 나와서 날 어떻게 벌어먹이니?”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캐릭터다. 이 둘이 나누는 대화는 2000년대에 철학과를 재학 중이던 내게도 유효했다. 영화 속 대학생들의 발랄한 모습들 가운데에도 1970년대 청춘의 고뇌와 우울한 정서가 함께 깔려있는데, 극 중 노래인 송창식의 ‘고래사냥’ 가사가 이 영화의 주제를 잘 담아내고 있다.‘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1970년대 더빙된 배우들의 말투와 과장된 연기는 요즘 관객들에게 꽤 낯선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그런 이질감을 받아들인다면 한국 최고 수준의 청춘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러닝타임 내내 6·25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은 1970년대의 개발되지 않은 서울 풍경이 펼쳐진다. 대학 캠퍼스, 자동차, 전철 등 지금과는 다른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다.
영화를 그저 평범한 연애 서사로 감상해도 재미있지만, 최고의 엔딩 장면을 비롯해 인상적인 명장면들이 무척이나 많다. 당구장에서 신문팔이 소년에게 500원을 주며 내기를 하는 장면은 도스토옙스키의 철학적인 소설을 연상케 하며, 송창식의 ‘왜 불러’가 흘러나오는 육교 추격 신은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또한 자전거를 타고 동해바다로 돌진하는 장면에선 영화의 주제를 대사가 아닌 미장센으로 표현한 하길종 감독의 천재성이 느껴진다.
한국은 작은 땅덩어리에 비해 유독 천재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사람이 요절까지 한다면 그러한 ‘천재 서사’는 더욱 확고해진다. 1960년대 미국 유학길에 올라 UCLA 영화과에서 수학한 하길종 감독은 한국으로 돌아와 7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하고 향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한국영상자료원의 디지털 복원 작업 덕분에 ‘바보들의 행진’은 ‘한국고전영화(Korean Classic Film)’ 유튜브 채널에서 고화질로 무료 감상 가능하다. 1970년대의 모습이 궁금한 청년이라면 모처럼 부모님과 함께 둘러앉아 그 시절을 기억하는 부모님들에게 청춘 시절의 추억여행을 선물하는 안방극장을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