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얼 영원
입력
수정
[arte] 김리윤의 부드러운 재료제목 없음(2012)
그러나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 자는 잠시나마 그 장소의 일부가 되며, 그중 무언가를 기억에 담아 경계선 바깥으로 가져 나온다. 그런 식으로 몸과 이미지 사이에서 우리의 삶이 이어진다.영원은 변화로써만 가능한 시간의 한 상태다. 영원은 변화만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영원은 변화를 손에 쥔 채로 시간을 벗어난 하나의 장소다. 영원한 것은 오직 변화뿐이다.2) 변화만이 진정한 영속이다. 영원은 거듭하는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영원은 변화를 의미의 일부로 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는 단어다. 너는 시청 앞을 걸으면서, 시청에서 남대문을 지나 한국은행까지 걷는 동안, 백화점 앞을 지나면서, 지하도 계단을 오르며, 지하도 입구라는 구멍을 통해 바깥의 도시를 마주하면서, 우체국 앞에 서서 이 문장을 여러 번 고쳐 쓴다.
그것은 아직 다 부서지지 않은 것들이 자기가 아닌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연약하지만 끈질긴 행렬이다. 1)
서울에서 너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때조차 발이 닿는 모든 장소를 배회하고 있다고 느낀다. 너는 아무런 기억도 없고 얼룩덜룩한 역사도 없고 돌출된 시간도 없는 깨끗한 장소를 상상해 본다. 이동의 배경으로만 기능할 수 있는 장소. 장막도 없고 버튼도 없고 창문도, 구멍도 없는 장소. 벽 같은 장소. 새카만 유리 같은, 그러나 마주 보는 이를 비추지 않는 장소. 문을 내고 싶다는 욕망을 촉발하지 않는 벽. 그 앞을 통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기분을 주는 장소. 배회의 감각이 소멸된 장소. 너는 상상하고 또 상상해 보지만 털끝 하나 알지 못하는 동물의 이목구비 같은 것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는 사실만 깨닫는다. 그런 장소를 원하지는 않는다. 너는 초록색 1711 버스에서 내린다. 충분한 것 이상으로 넓은 8차선 도로가 있다. 아귀가 썩 잘 맞지 않지만 평평하다는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한 보도블록들이 있다. 오래된 가로수들이 있다. 더러는 새것 같은 파사드를 덧입은, 오래되고 거대한 건물들이 있다. 반듯한 모서리들이 있다. 건물마다 들어찬 사람과 사물들이 있다. 길목마다 서로를 스치는 냄새들이 있다. 비좁은 버스 안에서 서로를 스치는 살갗들이 있다. 광역버스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시선의 얽힘 없이 서로를 지나치는 얼굴들이 있다.
이렇게나 단단한 물성으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가장 연약하고 무른 물성인 인간들을 지나치며 너는 걷는다. 일시적으로 연루되며 걷는다. ‘아직’과 ‘이미’ 사이에 놓인 찰나의 시간, 팽팽한 줄타기용 밧줄처럼 가늘고 아슬아슬하며 배신당하기 쉬운 순간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을.3) 이음매에서 탈구된 시간을.4) 너는 배회하듯 시간 위를 걷고, 시간 위를 걷는다고 착각하고, 돌출된 사건들로 구성된 시간, 장소에 가까운 시간, 시간으로 빚어진 장소를 서성이다 걸려 넘어지고, 넘어진 채로 잠들고, 넘어진 자리에서 코가 깨지고, 깨진 코를 땅에 박고, 냄새 맡고, 코를 깨뜨린 땅을 쓰다듬고, 땅이 너를 쓰다듬는다고 느끼는 데서 안락함을 찾는다.
너는 시청 앞을 걷는 동안 본다. 움직이는 나무와 사람과 차들 사이의 고정된 장면. 색이 없는 이미지. 천에 남은 주름만이 몸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이미지. 텅 빈 침대. 움푹하게 파인 두 개의 베개. 몸을 기억하는 장면 앞으로, 기억됨으로써 여전히 살아 있는 몸 앞으로 살아서 움직이고 살아서 냄새를 풍기고 살아 있어서 버석한 몸들이 지나간다. 그 장면 역시 일시적으로 이 공간을 점유했을 뿐이다. 무척 더운 날이다. 너는 드러난 어깨 위로 쏟아지는 여름 햇볕의 뜨거움을 선명하게 느끼고, 네 몸의 있음을 너무 분명하게 느끼느라 토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시청 앞을 걷고 있다. 너는 눈동자를 찢으며 달려오는 것처럼 시야를 파고드는 붉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다. 미래의 너는 사진 한 장 때문에 이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느끼지만, 네가 입은 옷을 제외하고 이 이미지의 모든 것은 꿈보다도 멀고 흐릿한, 네가 본 적 없는 현실이다. 네 몸에 덧입혀진 붉은빛은 흑백 사진 앞에서 장면의 내부로 침투하는 얼룩이 된다. 얼룩덜룩한 시간들, 장소들. 수많은 잠과 잠과 잠들. 그것은 부드럽고 주름진 입구를 열어젖힌다.
텅 빈 침대와 두 개의 베개. 미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심연의 가장자리에 거주하면서 의미를 창조하는 가능성을 설명하는 장면.5) 비밀로 남겨질 부분을 보장받지 못하는 텅 빔. 그것은 공백을 가진 이미지지만 그것이 가진 건 구멍 없는 공백이라서 무언가 흘러들어와 섞여버릴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냄새가 있고 부드러움이 있고 광택이 있고 열기와 온기가 있고 베갯잇에 달라붙거나 솜에 박힌 머리카락이, 잠을 덮는 푹신한 장막이 있다. 그것들은 단순하고 부드럽게 형태를 드러내 보인다. 시간을 품은 형태를. 그 장면은 일시적으로 이 공간을 점유했을 뿐이다. 그리고 장면 위로 불던 바람의 방향과 속도와 온도가 바뀌는 동안, 바람이 흔들던 나뭇잎 그림자가 사라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동안, 도로가 밀도를 낮추는 동안, 그것을 바라보는 눈들이 오가는 동안 내내 너의 눈과 마음을 부분적으로 그 장면에 붙들어 두었을 뿐이다.
붙들린 채로, 너는 다시 본다. 시청에서 남대문을 지나 한국은행까지 걷는 동안, 백화점 앞을 지나면서, 지하도 계단을 오르며, 지하도 입구라는 구멍을 통해 바깥의 도시를 마주하면서, 우체국 앞에 서서. 추운 날이었고, 너는 새파랗게 해를 거둬가는 어린 어둠 속에서 푹푹 날리는 눈송이 너머로 그 침대를 본다. 높은 곳에 걸린 평평하고 색이 없는 장면. 문이 달리지 않은 캄캄한 구멍 같은 비밀을 가진 장면. 그 구멍으로 이곳을 지나치는 몸들의 기억이 틈입하는 장면. 책장에서 꺼낸 도록에 쌓인 10년 치 먼지를 털어내며.
이제 너는 안다.
그 장면은 겨울이 오기 전에 그곳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은 너의 기억에 뚫린 구멍으로 푹푹 내렸을 뿐이라는 것을. 전당포, 한국 부동산, 우표 사랑, 신세기 치과, 미나미 환전, 블루클럽 명동점, 굿 에스프레소 위의 한 겹으로 덧입혀진 눈이 푹푹 날린다.
*
제목 없음(2023)시력이 약한 눈앞에서 세계는 단단해진다.변화만이 영원 속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상태다. 영원은 변화 속에 거주하는 시간의 이름이다. 영원은 변화 속에서만 숨이 붙어 있을 수 있는 생물이다. 영원은 변화를 덧입은 채로만 눈에 보이는 투명성이다. 영원과 변화는 한몸처럼 붙어있을 때만 서로가 있다고 느낀다. 변화는 영원을 손에 쥔 채로 시간에 속한 장소다. 변화하는 것은 영원 뿐이다. 영원만이 진정한 변화다. 변화는 거듭하는 영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너는 시청 앞을 걸으면서, 시청에서 남대문을 지나 한국은행까지 걷는 동안, 백화점 앞을 지나면서, 지하도 계단을 오르며, 지하도 입구라는 구멍을 통해 바깥의 도시를 마주하면서, 우체국 앞에 서서 이 문장을 여러 번 고쳐 쓴다. 모든 문장에 오류가 있다고 느낀다. 어떤 문장도 영원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도 손끝에서 수정되는 문장들이 있다. 아무래도 상관 없다. 너는 달아나는 이의 등을 가볍게 밀어주듯이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친다. 그리고 달아나는 이의 손을 잡아끌며 앞서 달리는 문장들도 있겠지.
보다 시력이 약한 눈앞에서 세계는 주먹을 쥐고,
그보다 더 시력이 약한 눈앞에서 세계는 수줍어하면서
감히 세계를 직시하려는 자를 박살 낸다.6)
서울에서 10년, 너는 기억들이 너를 깨뜨리는 시간을 지나, 너를 부수는 기억들을 지나, 기억들이 허무는 집을 빠져나와, 기억들이 무너뜨리는 지반을 밟으며, 구멍난 벽을 입구 삼아 통과하며, 벽이라 믿었던 커튼을 열어젖히며, 기억들이 미래로부터 너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지나 시청 앞을, 시청에서 남대문을 지나 한국은행까지, 백화점 건너편을, 지하도를, 우체국 앞을 걷는다.
너는 여전히 본다. 1991년, 2012년, 2023년. 10년 남짓한 시간이 세 겹 포개진 장소에서. 미술관은 사라지고 건물은 남아있다. 텅 빈 침대가 있는 장면은 사라지고 장면이 걸려있던 프레임은 남아 있다. 프레임 내부는 사라지고 프레임 바깥의 건물들, 나무들, 둥글게 휘어진 유리 벽이 남아있다. 텅 빈 침대가 있는 장면 대신 장면 전체가 텅 비워진 전광판이 남아있다. 너덜거리는 표면으로. 그것이 눈길을 끈다면 이토록 눈을 잡아채는 이미지로 가득한 도시에서 보기 드물게 눈길을 끌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누군가의 눈길을 끌겠다는 작은 불씨같은 욕망조차 없는, 아무것도 없고 작지도 않은 텅 빔이라서, 이미지를 모두 비워낸 이미지라서, 너덜너덜한 공백이라서, 시간이 헝클어뜨린 누더기 같은 평면을 그대로 걸친 프레임이라서 그럴 테지.
너는 본다. 그 위에 덧입혀진 그 장면을, 여전히. 몸과 피부들, 사라진 장소들, 변화로써 영원이 되는 살갗들, 존재를 증언하는 기억들, 평평한 흑백 이미지 속 두 개의 머리통이 어떻게 양감을 얻는지. 세 겹의 시간 사이에서 죽음과 질병의 거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는지. 너는 본다. 단단하고 둥그런 형상이 아닌, 겹겹이 쌓여 달콤하게 부푸는 패스츄리처럼 부푸는 두 개의 머리통을. 시간에서 돌출된, 바삭하고 쉽게 부서지는 이미지를.
그래 너는 여전히 본다. 시청 앞을 걸으면서, 시청에서 남대문을 지나 한국은행까지 걷는 동안, 백화점 앞을 지나면서, 지하도 계단을 오르며, 지하도 입구로 뚫린 구멍을 통해 바깥의 도시를 마주하면서, 우체국 앞에 서서. 후덥지근한 날이고, 너는 낡고 피로해 보이는 분수대 너머로, 더위에 지친 채로 빠르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의 고정된 레이어로, 중고차 판매 플랫폼 광고판 위에 포개진 레이어로, 여전히, 텅 빈 그 침대를 본다.
높은 곳에 걸린 평평하고 색이 없는 장면. 비밀이 보존된 장면. 이제 너 같은 이들의 기억 속에만 있을 장면. 그 장면에 뚫린 비밀, 문이 달리지 않은 캄캄한 구멍 같은 비밀로 이곳을 지나치는 몸들의 기억이 틈입하는 장면. 그 장면에 새겨진 기억이 이곳을 지나치는 몸들에 구멍을 내고 흘러드는 상태. 지나간 시간 아래로 현재를 가라앉히는, 과거보다 가벼운 장면. 중고명품매입, 사주 작명, 한국 부동산, 블루클럽 명동점, 세븐일레븐, 신세기 치과, 미나미 환전 위로 포개진 장면. 기억에 기거하며 영원한 현재가 되려 하는 고정된 시간, 기억에 속한 채로 흔들리는 장면, 흔들리며 부서지며 흐려지며 다시 빚어지며 영원에 속하는 장면을.
서울에서 10년, 너의 현재 안으로 모아들여지지 않는 시간, 이음매에서 빠진 시간7), 네가 가늠할 수 없는 방향으로 돌출하는 변화를 동반한 시간, 일종의 영원 속에서 너는 걷는다. 네가 만난 건 거대한 대포, 다 자란 어둠, 미숙한 빛, 비대한 웃음, 산 것들이 우글거리는 폐허, 신음의 속도로 달려가는 사막, 서울에서 10년, 너는 지쳤다, 너를 지탱하는 피로에. 피로한 너는 걷는다. 네가 만난 것들과 함께 걷고 혼자 걷고 친구들과 걷고 사랑과 함께 걷고 처음 만난 이와 함께 걷고 개와 함께 걷는다.
네가 거듭하는 영원과 이 장소가 거듭하는 영원이 부드럽게 포개지는 순간을 걸었고 부딪히며 박살나는 순간을, 바로 옆을 지나면서도 서로를 모르는 척 하는 순간을, 다 자란 어둠이 하듯이 서로를 집어삼키는 순간을, 서로를 건드리며 주름지는 순간을, 얼기설기 꿰매지는 순간을, 서로를 폭 덮고 재우는 순간을 걸었다. 네가 겪어본 적 없는 시간을 그리워하며. 너는 너와 가장 닮은 둘을 열망한다. 너는 너와 동일한 것만을 정말로 사랑할 수 있다. 너는 부서졌지만 여전히 부서지지 않은 부분을 가진 몸이다.
‘Double’의 사전적 의미는 쌍, 이중, 변주, 표리, 주름, 역주행, 함정, 반복, 분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8)
Double은 우리의 삶에 고착되기 마련이다.9)
쌍은 우리의 주름진 시간에 담긴 채로 함께 있기 마련이다.
이중은 우리의 동일성에 포개지기 마련이다.
변주는 우리의 삶에 들러붙기 마련이다.
표리는 우리가 한 데 섞어놓은 것들의 이름이다.
주름은 우리가 머무는 공간이다.
역주행은 우리가 사랑하는 운동이다.
함정은 우리가 서로를 닮는 방식이다.
반복은 심연의 가장자리에 거주하면서 의미를 창조하게 마련이다.
분신은 박살 난 둘이 세계를 직시하는 방법이다.
둘은 언제나 함께 없다.
둘은 언제나 함께 있다.
이 글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개인전 'Double'(2021.6.21–9.27, 플라토)의 일환으로 서울 시내 곳곳의 전광판에 설치된 작품 '무제 Untitled' 중 태평로빌딩과 명동 신세계백화점 맞은편 중앙우체국 설치물, 2023년 5월에 본 같은 장소의 풍경, 그리고 이승훈의 시 '10년'(<당신의 방>, 문학과지성사, 1986)을 재료 삼아 쓴 것이다.
“무제” “Unttitled” Dimensions vary with installation, billboard, 1991
명동 신세계백화점 맞은편 중앙우체국 옆 설치 전경 ㅣ 사진 촬영 김리윤
이탤릭체로 표기한 부분은 이승훈의 시 '10년'에서 가져온 것이다.명동 신세계백화점 맞은편 중앙우체국 옆 설치 전경 ㅣ 사진 촬영 김리윤
1) 윤원화, <껍질 이야기>, 워크룸프레스, 2023.
2) “펠릭스에게 작품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영원한 것은 오직 변화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안드레아 로젠과 안소연의 인터뷰,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Double>, 플라토, 2012.
3) 리베카 솔닛,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노지양 옮김, 창비, 2021.
4) 자크 데리다·마우리치오 페라리스, <비밀의 취향>, 김민호 옮김, 이학사, 2022.5) 니콜라 부리오, <관계의 미학>(현지연 옮김, 미진사, 2011)에 인용된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의 말을 재인용.
6)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아포리즘>, 문학과지성사, 2022.
7) 4)와 같은 책.
8) 안소연 '전시를 개최하며', 2)와 같은 책.
9) 8)과 같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