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칼럼] "돈 풀기 끝은 망국" 이창용의 직격

'땜질 처방으론 더 못 버텨' 탄식
작심 비판도 외면 '무책임 정치'

백광엽 논설위원
중앙은행과 중앙은행장은 전통적으로 비밀주의가 신조다. 전설적인 영란은행 총재 몬터규 노먼은 “설명도 변명도 하지 않는다”가 모토였다. 앨런 그린스펀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도 전문용어를 동원한 해독 불가 발언으로 악명 높았다. 패닉의 순간에도 최종대부자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전지전능을 가장한 의도된 화법이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신비주의 전통을 뒤집는 직설화법으로 충격을 던졌다. 지난주 기자간담회에서 장기 저성장을 우려하는 질문에 ‘하아~’라는 한숨으로 시작해 긴 쓴소리를 쏟아낸 것이다. ‘돈 풀기에 중독된 경제의 끝은 예정된 파국’이라는 게 요지다.이 총재는 ‘이미 장기 저성장 늪에 빠졌다’고 단언했다. “구조개혁만이 해법인 것을 누구나 알지만 이해집단에 발목 잡혀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단기 땜방에 불과한 통화·재정 확대에 매달리는 것은 ‘나라 망가지는 지름길’이라는 직격이었다.

분노가 묻어나는 작심 발언은 정치권과 정부를 향했다. ‘돌아가는 걸 보면 연금·노동·교육개혁도 하지 말자는 것 아니냐’는 말이 잘 보여준다. 그의 진단대로 한국은 노쇠국이 다수인 OECD 평균에도 못 미치는 초유의 저성장에 빠졌다. 그 와중에 출산율 자유낙하, 경제·안보 새판짜기, AI 쓰나미라는 삼각파도와 맞닥뜨렸다.

그런데도 문제 해결에 골머리를 싸매야 할 국민 대표들은 표(票) 되는 입법과 권력투쟁뿐이다. 거대 야당은 ‘돈 더 풀기’와 ‘경제 더 흔들기’에 혈안이다. 여당에선 방향타는커녕 합리적 대안 제시조차 실종이다. 구조개혁을 외쳐온 장관과 대통령실 참모들도 도대체 무얼 하는지 이름조차 까마득하다.사실 중앙은행장은 ‘누리기’에 더없이 좋은 꿀보직이다. 명예와 독립성이 탁월한 데다 냉정하게 보면 업무도 임기 중에는 잘잘못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자율 조정이 전부다. 시장과 여론에 편승해 적당히 인기 관리하며 임기를 때워도 그다지 욕먹을 일이 없다.

이 총재의 구조개혁 언급은 월권적이다. 한은 목표인 물가와 금융시장 안정을 벗어나는 영역이어서다. 그런데도 이 총재는 기자들의 쓴소리 질문을 유도한 뒤 작심 발언했다는 후문이다. 논란을 감수하고 불편한 화두를 던진 용기 있는 공직자의 존재에 안도감을 느낀 이들이 많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정·통화 중독 경제’로부터의 탈출이다. 이 과업에 성공하려면 이 총재가 생각해볼 대목이 많다. 그의 격정 토로에도 정치권은 무반응이다. 기본적으로 부박한 정치·언론 탓이지만 메시지 전달력도 점검해봐야 한다. ‘디지털 뱅크런’ 시대에 중앙은행장 말발이 안 먹히는 것은 그 자체로 중대 리스크다. 혹여 취임 직후부터의 다변이 ‘말 인플레(가치 저하)’를 부른 것은 아닌지. “금융정책은 98%의 말과 2%의 행동”(벤 버냉키 전 Fed 의장)이라고 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이 총재의 한은은 갈 길이 멀다.독야청청 스타일의 중앙은행이 빠지기 쉬운 ‘전문가 함정’도 경계 대상이다. 한국 경제학계 최상급 ‘아웃풋’인 이 총재의 자신감이 과하면 외려 쌍방향 소통을 저해해 독이 될 수도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30년’으로 연장한 주역도 화려한 이력의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였다.

이 총재 말처럼 중앙은행은 ‘진화하는 생물체’여야 한다. 문제는 점증하는 역할 증대 요구와 보편성·무차별성이라는 통화정책의 본질이 모순적이라는 점이다. 오지랖넓게 고용(성장)·양극화 해결사까지 자임하다 위기로 치달은 중앙은행 실패 사례가 넘치는 이유다. 기왕 칼을 뺐으니 중앙은행의 ‘뉴노멀’을 세워나가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