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화의 역설…대졸·男 채용쏠림 더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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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직 전환 후 고졸·여성 일자리‘구의역 사태’ 이후 무기계약직 직원의 대규모 일반직 전환에 나선 서울교통공사에서 고졸이나 여성 등 취업 약자의 일자리가 대거 남성, 대졸자에게 넘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무기계약직 등 고용 약자를 배려한 정책이 오히려 취업약자를 고용시장 주변부로 밀어내는 역설을 낳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라진 서울교통공사
직원 채용 정규직으로 바뀌며
조리직 공채까지 대졸자 몰려
합격자 중엔 석사 학위도 3명
블라인드 방식도 시험 보는 탓에
장년층 등 취업약자 설자리 잃어
고용안정 외쳤는데 취업약자가 불이익
1일 공사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공사 직원 가운데 최종학력이 대졸 이상인 비율은 무기계약직의 일반직 전환 이전인 2017년 54%에서 2022년 64%로 10%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고졸 이하 직원 비중은 같은 기간 23%에서 15%로 감소했다.고졸·전문대졸이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신입사원 가운데 최종학력이 대졸 이상인 비중은 2017년 50.2%에서 2022년 77.8%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전문대졸 비중은 31.1%에서 6.9%로 급감했다. 공사가 분류한 ‘전문대졸’은 대학 재학 중이거나 졸업예정자 가운데 취업한 이들도 포함하고 있어 실제 대졸자 편중은 통계보다 더욱 심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 다른 취업 약자인 여성·장년층의 일자리도 남성·청년층으로 넘어가고 있다. 공사 내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조리직이 대표적이다. 조리직은 여성·장년층 직원이 주로 일하던 직무였지만 2020년 공채 합격자 53명 가운데 47명이 대졸자였다. 심지어 3명은 석사 학위 소지자였다. 합격자 중 20대가 35명으로 과반을 차지한 데다 성비도 남성이 42명으로 여성(11명)보다 4배 가까이 많았다.
“취업약자 배려한 채용 방식 필요”
공사 무기계약직의 일반직 전환 정책은 2016년 5월 구의역 사태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외주업체 직원이 지하철에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공사가 위험 업무를 직접 책임지지 않고 외부 업체에 떠맡긴다”는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을 추진하자 공사는 2018년 3월 무기계약직 1285명을 공사 일반직으로 전환했다. 문제는 위험 업무와 직접 관계가 없는 구내식당 조리 직원과 목욕탕, 매점 직원까지 무분별하게 일반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당장 무기계약직의 고용안정은 달성했지만 장기적으론 취업 약자의 일자리 기회가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공사는 블라인드 방식을 통해 학력, 성별에 관계없이 직원을 뽑는다는 입장이지만 절차적으론 국가직무 능력표준(NCS) 테스트와 같이 객관식 시험 등을 거치기 때문에 장년층에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호봉과 임금이 연동되는 일반직 대우를 보장하다 보니 지원자풀도 청년층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블라인드 방식 채용이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곳은 공사뿐만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고졸 신화’를 낳은 은행업계가 대표적이다. 2013년 400명대였던 4대 시중은행의 고졸 입사자 수는 블라인드 채용 방식 도입 후 2020년대부터 100명대로 떨어졌다.전문가들은 고용 안정과 양극화 해소를 위해 도입된 정책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라고 꼬집었다. 이종욱 서울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공사가 반도체를 만드는 곳도 아니고, 노동생산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직무에 무기계약직 직원을 채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사회 약자를 돕는다는 정책이 역설적으로 여성, 고졸 등의 근로자를 취업시장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