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어느 시골 소녀의 꿈

이해영 세종학당재단 이사장
2000년 3월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해 한국어교육 전공생 양성을 막 시작한 때가 생각난다. 해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인턴십 프로그램을 만들 테니 지원해달라는 신참 교수의 제안에, 누가 해외에서 한국어를 배우냐고 반문하던 처장님의 표정도 추억처럼 떠오른다. 결국 그때 설득당해주신 덕분에, 장학생이 돼 해외로 떠난 학생들이 대학교수가 됐으니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

바로 그 인턴십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이 있다. 당시 인턴십 참가 학생들이 활동한 태국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 ‘작은이’라는 한국식 별명을 가진 여학생이 있었다. 항상 분홍색 공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펼쳐보면 한국 드라마 속 단어가 빼곡했다.작은이가 졸업하고 20년이 흘렀다. 태국에서 한국어는 인기가 날로 높아져 2018년 대입 시험 과목으로 채택됐다. 유일무이한 왕립 쭐라롱꼰대 한국어학과에 입학하려면 적어도 3급 수준의 한국어 능력이 필요했다. 이런 변화 가운데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며 중추적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분홍색 수첩의 주인공 작은이, 수파펀 분룽 교수다. 드라마를 즐기며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는 한류를 좋아하던 작은이를 전문가 수파펀 분룽 교수로 만들어줬다.

이게 어디 태국에만 국한한 것이랴. 해외를 가면 한국어를 구사하는 현지인을 쉽게 만나고, ‘한국어 패치’를 장착한 세종학당 출신 글로벌 인재가 교수, 연구원, 교육행정 전문가, 번역가는 물론 심지어 판소리 소리꾼이나 경기민요 이수자로 활동하는 것도 본다. 한류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으로 시작된 한국어 학습이 제2, 제3의 수파펀 분룽 교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작년 국내 대학의 외국인 학생 17만 명 중 학위 취득 목적의 유학생이 전체의 4분의 3에 이르렀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멈춘 듯한 시기에도 학위 과정 유학생 수는 오히려 증가 곡선을 그렸다. 세종학당재단 자료에서도 한국 유학이나 학업, 그리고 한국 관련 취업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전체의 50%가 넘었다는 의미심장한 보고서를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은 취미활동으로서 한류 소비를 넘어 스스로 한류를 생산하고 미래의 한국 전문가로 활동하기를 꿈꾸게 된 학생들이다. 한국어와 한류에 대한 호기심이 깊은 탐구와 지속적인 향유로 이어지고, 이들이 진정한 ‘한국통’이 될 수 있도록 전 세계 세종학당은, 그리고 외국인 한국 전문가를 양성하는 우리 대학들은 한마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또 다른 태국의 시골 소녀 작은이들의 꿈이 이뤄질 수 있도록. 자, 설레는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