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노란봉투법' 아닌 '파업조장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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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중소기업부장나치 치하 독일에서 언어의 변용(變容)에 주목했던 문헌학자 빅토르 클렘퍼러는 그 실상을 주저 <제3제국의 언어>에 상세히 담았다. 이 책은 제목부터 독일어가 아니라 같은 뜻의 라틴어 약어 ‘LTI(링구아 테르티 임페리)’로 표기됐다. 메시지를 알아볼 이들만 찾아보라는 듯 은어(隱語) 같은 서명을 택한 것이다.
거짓말이 바꾼 진실
‘무의식중에 들이켜는 독’에 비견된 왜곡된 명칭의 위험함은 책 곳곳에 상세히 담겼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한 뒤 독일 내 전 언론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대독일의 크리스마스’라는 별칭으로 불렀다.‘유대 볼셰비즘’이란 표현처럼 부정적인 내용에는 습관적으로 ‘유대인의’라는 형용사가 따라붙었다. 유대인 학살은 ‘최종적인 문제 해결’로, 강제수용소행은 ‘대피’로 바뀌었다.독재자 히틀러는 독일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새로운 그리스도’로 격상됐다. 그의 말은 ‘시’가 됐고 ‘철학’으로 대우받았다. 소위 ‘믿음의 언어’는 참혹한 실상을 직시하는 눈을 가렸다. 갖은 말장난을 서슴지 않던 나치의 광기는 과연 먼 나라에서 벌어졌던 옛날얘기에 불과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용을 알기 어렵게, 두껍게 분칠한 용어들이 본질을 가리는 경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한다. 야권에서 노란봉투법이라고 부르는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은 불법파업에 대한 사측의 대항 수단인 손배가압류 청구를 제한하고, 정치사회 이슈까지 파업 대상에 포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동계가 수시로 파업을 강행할 길을 활짝 열어젖힌 셈이다. 재산권 침해를 방조해 위헌 논란마저 빚어진 이 법안을 ‘파업 조장법’이라고 부르는 게 본질에 부합할 것이다.한 시민이 파업 후원금을 노란봉투에 담아 보냈다는 소위 ‘미담’을 들먹이며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법안이 끼칠 피해는 광범위하고, 후유증은 오래간다. 거짓 언어로 추한 실상을 감춘 폐해는 맛이 변변찮은 음식점이 요란한 간판에 집착하는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언어 오염의 또 다른 사례로는 ‘쓰레기 시멘트’를 꼽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주요 시멘트 업체들은 매연을 뿜어대는 유연탄 대신 폐타이어나 폐플라스틱, 육골분 같은 순환자원을 시멘트를 생산하는 소성로의 가연 연료로 사용한다.
이를 두고 유독 국내의 소수 환경원리주의자만 “쓰레기를 원료로 시멘트를 만든다”고 강변한다. 각종 폐기물을 재활용하고 탄소 배출도 줄이는 첨단 공법이 파렴치한 환경 파괴 행위로 뒤집히는 건 순간이다. 저주에 가까운 표현을 골라 쓰는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덧칠'은 언젠간 벗겨져
이뿐만이 아니다. 사업자단체면서 노조의 탈을 쓴 건설노조와 화물연대, 동반 성장이란 미명하에 시장 경쟁을 막는 중소기업적합업종제, 비정규직 근로자를 2년마다 떠돌게 한 비정규직 보호법처럼 잘못된 이름을 앞세운 부정적 사례는 헤아리기 힘들다.덧칠은 아무리 짙게 해도 언젠가는 바탕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허황한 말로는 진실을 감출 수 없다. <제3제국의 언어>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도 “히틀러가 ‘적들이 사라졌다’고 외친 순간 적군은 베를린 코앞까지 진출했다”고 꼬집은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