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매장 책방됐다…<인생, 예술> 누구나 가져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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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희의 아트&럭셔리]이솝은 1987년 호주 멜버른에서 탄생한 스킨케어 브랜드다. 이솝 우화를 좋아했던 미용사 출신의 창업자 데니스 파피티스가 "이솝 우화처럼 심플하고 간결하면서 질 좋은 제품을 제공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전세계 25개국 200개 넘는 매장을 운영하며 '지속가능한 화장품'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이솝이 최근 서울 한남동과 신사동 가로수길에 특별한 실험을 하고 있다. 향수와 화장품이 놓여있어야 할 선반에 책으로 가득 채운 것. 누구나 매장에 들어와 책을 읽다가 그냥 나가도 되고, 책을 고르는 사람에게는 예쁜 리본 포장에 감싸진 책을 그냥 준다.
이솝 한남동과 가로수길 '우먼스 라이브러리'
각 매장에 7명씩 여성 작가 14인의 '책 팝업'
글로 쓰는 예술과 문화 테마로 14일까지 운영
창업자의 철학 "문학이 균형잡힌 삶의 필수 요소다"
런던 성소수자 도서관 등 전 세계에서 도서관 열어
이 '아낌없이 주는 도서관'에 놓인 책들에는 전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모든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 그렇다. 이 도서관 프로젝트의 이름은 '우먼스 라이브러리'다. 이솝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각 매장에 7명씩, 여성 작가 14인을 뽑았다. 10개 출판사로부터 직접 책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활동을 격려하기 위해서다. 한남동에는 비문학 작가 7명이(5월 23일~6월 4일), 가로수길에는 문학 작가 7명(6월 1일~6월 14일)이 방문객을 기다린다. 각 장르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결과물을 만드는 작가들을 꼽았다.
○이솝 한남엔 예술과 문화 서적들
이솝 한남에서는 ‘글로 쓰는 예술과 문화’를 테마로 도서관을 꾸렸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폭넓은 시각이 돋보이는 여성 작가들의 도서들을 선정했다.
대표 작가는 윤혜정이다. 그는 오랜 기간 패션 매거진에서 미술을 깊게 취재한 에디터로, 현재는 국제갤러리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윤혜정이 쓰는 글은 날카롭다. 누군가의 어머니와 딸을 넘어 독립된 여성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담은 글을 쓴다. 이번에 이솝 한남점이 고른 책은 지난해 출간된 <인생, 예술>. 28명의 현대 예술가들의 대표작들과 얽힌 저자의 사적인 경험을 ‘감정, 관계, 일, 여성, 일상’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로 풀어낸 예술 에세이다. 이외에 강석경(작가), 김보희(화가), 김유미(도예가), 박상미(작가) 이현아(아트라이터) 정옥희(무용연구가) 등의 책이 전시됐다. 한남동 이솝에서 만날 수 있는 책들은 모두 여성이 쓴 예술과 문화에 관한 책들이다. 미술을 넘어 도예, 춤, 그리고 패션까지 여러 분야를 넘나든다. 이솝은 "지금 한국 문화계의 흐름은 다양한 세대의 여성 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번 공간을 준비했다. 이곳에 모인 7명의 작가들이 선보이는 글은 단순히 어떤 작품이나 문화적 현상을 소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예술의 발자취에 자신의 경험이 묻어있다. ○가로수길은 여성작가의 '문학'이 채워
또 다른 '여성 도서관'이 펼쳐지는 가로수길에서는 향기 묻은 소설집들이 6월 14일까지 방문객을 맞는다. 이솝은 가로수길 매장 도서관을 '글로 쓰는 삶: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테마로 꾸몄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가장 정확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꼽았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서이제의 <0%를 향하여>, 손보미의 <우연의 신>, 임솔아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 정소현의 <품위 있는 삶>,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 등이다.
이솝은 한국 문학계의 미래가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낼 줄 아는 여성 작가들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 공간을 꾸몄다. 이곳에 모인 7인의 여성 소설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현실과 소설 속의 세계 그 사이의 경계가 없어진 듯 느껴진다. 이들이 풀어내는 통찰력 있는 문장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끔 한다. 소설 속에 담긴 미래 세상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내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준다. 대표 작가는 손보미다. 그는 미래가 가장 유망한 작가를 선정해 수여하는 '젊은 작가상'을 세 번 받은 작가다. 2022년엔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당기는 대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최근에는 여성이 주인공, 일인칭이 되는 작품을 다수 선보이고 있다.
이솝 가로수길에 놓인 책은 <우연의 신>. 전 세계에서 딱 한 병 남은 조니 워커의 화이트 라벨을 찾는 과정을 담았다. 주인공의 여정을 통해 저자는 인간의 삶은 아주 작은 우연에 의해 계속 바뀔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읽는 독자들도, 책 속 주인공도 말미엔 어떤 행복이나 불행도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런던 소호 등 세계 각국에서 '서점' 열어
이솝의 이런 도서관 프로젝트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솝은 전 세계에 가진 매장을 활용해 과거에도 의미 있는 도서관을 계속 만들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6월 영국 런던 소호 중심가 매장을 이용해 진행한 '성소수자 도서관'이다. 이솝의 파격적인 도서관은 영국에서 매년 진행되어 온 성소수자 퍼레이드인 '프라이드 마치'의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차려졌다. 이곳에서도 이번 팝업과 마찬가지로 진열대를 비우고 성소수자 저자들이 쓴 책들을 올렸다. 이 도서관에 들어갈 책들도 모두 '성소수자 서점'에서 구매했다. 성소수자들의 문학계 활동 저변을 넓히기 위한 이솝의 기발한 생각이었다.
이솝이 자신의 매장을 이용해 도서관을 꾸미는 건 창업자의 신념에서 시작됐다. 이솝의 창업자 레니스 파피티스는 지적인 교류가 곧 균형 잡힌 삶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그 중심엔 무조건 문학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파피티스는 36년 전 호주에서 첫 매장을 열 때부터 각종 도서관 행사를 열며 손님들에게 책을 나눠줬다고 한다. 그는 이때부터 행사 기간엔 제품 진열대를 싹 비우고 책을 쌓아뒀다. 매장을 찾는 사람들이 "화장품 매장에 돈을 버는 화장품을 빼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그는 이 질문을 받자마자 이렇게 대답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되는 게 나의 브랜드 철학이다. 최소한의 제품만을 남겨둬도 절제된 우아함을 표현할 수 있다."
이솝의 이번 행사는 모두 마일스톤커피와 함께한다. 매장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내어준다. 이 커피도 '우먼스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에 맞게 모두 여성 농부들이 재배한 원두로 만들었다. 열악한 아프리카 지역 여성 농부들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