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석 칼럼] 누구나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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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화된 정치인과 투자사 대표살이 올랐다. 포동포동.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 사내 헬스장을 찾는다. 매번 별로 붐비진 않는다. 주위에 포동이들이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생각한다. 줄줄이 비어 있는 로커(물품 보관함) 앞에 설 때마다 망설인다. 몇 번을 골라야 하나…. 어디선가 주워들은 얘기가 떠오른다. ‘사주에 물이 부족한 사람은 1, 6번이 행운의 숫자다.’ 선택은 16번 로커. 매번 편해졌다.
이성 잃은 광기가 사회 망가뜨려
안재석 한국경제TV 뉴스콘텐츠국장
우리 뇌의 평균 무게는 1400g 정도. 성인 남성 체중의 2% 안팎이다. 무게에 비해 에너지 소비는 많다. 섭취한 칼로리의 20%가량을 두뇌가 쓴다. 머리를 쥐어짜면 25%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생존엔 칼로리 소비를 줄이는 것이, 즉 머리를 덜 쓰는 게 유리하다. 고민, 판단, 선택 등의 과정이 불편한 건 이 때문이다. “일은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다.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라고 말한 프랑스 작가 미셸 트루니에는 뇌의 작동 시스템을 정확히 꿰뚫었다.소중한 칼로리를 매번 고민하느라 쓸 수는 없다. 어떤 사회든 관례와 관습 등 ‘정해진 규칙’이 존재하는 이유다. 불필요한 칼로리 소비를 막는 장치다. 늘 해오던 일에 “왜요?”라고 토를 다는 MZ세대가 불편한가? 이 역시 생존 본능이 한 원인이다.
관례와 관습으로 부족한 자리는 ‘신(神)’이 채운다. ‘신의 말씀’은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신의 존립 근거가 ‘무오류’이기 때문이다. 눈치 없이 “왜요?”라고 되물으면 왕따 된다. 역사는 그렇게 흘렀고, 지금도 여전하다. 가끔 인간이 신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팬덤’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동력이다.
요즘은 특히 정치권에서 두드러진다. 특정 정치인을 신격화하면 반대편은 그 즉시 ‘사탄’이 된다. 이런 구조에 몸을 맡기면 복잡한 세상사 단칼에 명확해진다. ‘개딸’이든 ‘태극기 부대’든 작동원리는 모두 동일하다. 심지어 신이 움직인 흔적은 모두 신화가 되고 계시로도 읽힌다. 수박 한 입만 베어 물어도 신도들은 “수박(내부 배신자)을 색출하라”는 지시로 받아들인다. 5G 시대에 이런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라니.누구에게나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판단의 영역이 사회 전체로 확장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치 지도자가 원전 사고를 다룬 영화를 보고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렸다고, ‘탈원전’이 정부의 최우선 에너지정책이 되면 곤란하다. 의정활동 중 암호화폐 투자를 한 국회의원이 같은 종파에 속한다는 이유로 ‘검찰 탄압의 희생양’이라는 면죄부를 받는 것도 이상하다. 사회적 논의는 ‘이성’이라는 필터를 거쳐 정화된다. ‘신화’라는 외피를 걸치면? 합리적 이성은 종교적 광기라는 독약을 먹고 즉사한다. 피해는 무차별적이다. 신도든 이교도든 높아진 전기요금은 모두 내야 한다.
정치나 정책뿐만 아니다. 일반인들이 사는 ‘사바세계’에도 비슷한 일이 흔하다.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발(發) 주가 폭락 사태가 대표적이다. 돈을 끌어모은 라모 대표가 ‘투자의 신’이 되는 순간 이성은 마비되고 파국은 정해진 수순을 밟는다. “어떻게 우리 펀드만 매번 큰 수익이 날 수 있지?” 아무도 묻지 못한다. 이성을 결여한 무조건적 신뢰는 이렇게 개인과 사회를 망가뜨린다.
‘시체가 돌아왔다’라는 영화엔 보험사기꾼이 등장한다. 영업 노하우를 묻는 말에 그는 ‘믿음’을 강조한다. “믿기 시작하는 순간, 속기 시작하는 거거든.” 이성은 어이없는 실패를 막는 유일한 방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