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군의 신년인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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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연수의 듣는 소설그날은 처서였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입이 비뚤어진다고 그녀의 아빠는 말하곤 했다. 이로써 한 철 장사가 끝나기에 아빠로서는 반길 만한 날이 아니었지만 그날은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드디어 빚을 모두 갚게 됐던 것이다. 이를 기념해 하루 식당 문을 닫고 가까운 바닷가로 놀러가 맛있는 것을 먹고 오자고 아빠는 말했다. 그렇게 자동차의 앞좌석에는 그녀의 부모가, 그리고 뒷좌석에는 언니와 그녀가 탔다.
가는 길에 그녀는 아빠와 사소한 언쟁을 벌였다. 훗날 두고두고 부끄럽고 후회할 말들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빚을 다 갚았으니 식당 그만하자고 말한 게 시작이었다.“학교 다니는 내내 따돌림을 당했거든. 보신탕집 딸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도 그런 내가 싫었는데, 다른 애들은 오죽했을까. 아빠는 ‘아빠하고 엄마가 지금까지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그게 부끄럽다고!’라고 소리쳤어. 지기 싫어 나도 소리쳤어. ‘그냥 싫다고요!’ 그 가족이 아니라 다른 가족이 우리 가족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피곤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사고가 일어났어.”
병원에서 깨어난 뒤 그녀는 그날 자신들이 탄 승용차가 졸음운전 중이던 트럭과 정면충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가 처음 한 말은 “언니는요”였다. 그 사고에서 자신과 언니만 살아남은 걸 아는 사람처럼 말을 해 간호사들은 의아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언니는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중환자실에 있었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건 그냥 알았어. 어떤 앎은 그냥 알 수 있더라. 그런 상황에서 언니마저 죽는다면 이 세상에 나 혼자 남는 거잖아. 나도 죽었으면 싶었는데, 병상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으니. 그저 엉엉 울었지. 나중에 의식이 돌아온 뒤, 언니는 내 울음소리 듣고 엄마 아빠 못 따라 갔다고 말하더라. 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중환자실하고 같은 층도 아니었는데? 그러자 언니가 말했어.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지.”그러면서 그녀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던 그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아직은 젊고 꿈에 부풀어 있던 젊은 시절의 자신도 그를 올려다봤다. 젊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비로소 그는 간절히, 다시 한 번 그 삶이 살고 싶어졌다.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 뒤로 언니는 이따금 내게 ‘기억 안 나니?’라고 묻곤 했어. 사고 나서 의식을 잃었을 때,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거야. 엄마, 아빠, 나, 언니, 모두. 하얀 빛 속에서. 기억이 안 나니 상상할 뿐이지만, 그 생각만 하면 너무나 기뻐. 마지막 순간에 엄마와 아빠를 환한 빛 속으로 보내드렸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언니는 말했어. 죽음은 없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고.”
택시 뒷좌석의 그는 울음을 그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는 언니의 설명이야. 태어날 때 우리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오는 게 있어.”
“가지고 오는 것?”
“응. 의식이 생기면 ‘지금 여기’가 우리 앞에 펼쳐져.” 그러면서 그녀는 가상의 TV 화면을 보여주듯이 눈앞에다가 두 손으로 크게 네모를 그렸다.
“우리 앞의 바로 이것. 바라보고 감각하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 우리는 저마다 이걸 가지고 태어나는 거야. 인생의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 나타나. 인생은 과거나 미래에도, 생각이나 망상에도 있지 않아. 바로 지금 여기에 있어. 어때? 지금 여기, 너한테는 뭐가 있니?”
탁자를 툭툭 쳐 주의를 끌며 그녀가 말했다.
“네가 있지.”
젊은 시절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도 말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병아리 군이 자신의 일생을 담은 영상을 보여준 이유를. 그건 과거의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계속되는 그의 삶이었다.
“그래, 내가 있어. 네가 마음을 썼기 때문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지금 여기, 이것은 네가 마음을 쓰는 그대로 다 보여줘. 그리고 그 마음은 아무리 써도 줄지 않아. 끝이 없어.”
“내가 지금 좀 바빠서 그러는데……” 젊은 자신은 그녀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리를 뜨려는 듯 그는 고쳐 앉았다. 그는 젊은 자신에게 말했다. 지금 여기를 떠나지 마. 앞에 있는 그녀에게 귀를 기울여. 언니는 어떻게 죽음이 없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는지 들어야 해.
어떤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젊은 자신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아까처럼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젊은 자신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황홀감이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한 ‘지금 여기’는 여전히 그의 앞에 살아 있었다. 그가 마음을 쓴 것들이 지금 여기,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거기 잘못된 것은 없었다. 잘못된 선택도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마음을 쓴 대로 펼쳐졌다. 죽고 난 뒤에도 ‘지금 여기’는 그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언니는 어떻게 죽음이 없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거야?”
젊은 자신이 그녀에게 물었다. 더 듣지 않아도 그는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여기’는 죽지 않는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 안에 든 죽음마저도. “병아리 군.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하지?”
“기억하고말고.”
병아리 군이 유쾌하게 말했다.
“그날 삐약삐약 울어대던 자네를 보니 어떤 마음이 생기더라구. 그래서 집에까지 데려갈 수 있었지. 방 한쪽 구석, 자네가 있던 종이 상자에서 새어나오던 주황색 전구빛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환하다네. 이제는 잘 알겠네. 그게 내가 마음을 써서 만든 풍경이라는 걸. 그런 황홀한 풍경 속에 살면서도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며 어딘가 다른 곳을 찾아다녔지. 마음을 써서 매순간 지금 여기를 만들어내면서도 마음 쓰는 줄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모르고 살았어도 내 인생을 살았다는 걸 이제 알겠네. 지금 이 순간마저도 내 인생이라는 걸. 이제라도 알게 해줘 고맙네.”
그러자 차창 밖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밤의 강 위로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펑펑펑 터지고 있었다.
“신년을 축하하는 불꽃놀이야.”
병아리 군이 말했다.
“또 신년인가?”
“그렇지. 신년은 해마다 찾아오니까.”
“그렇다면 해피 뉴이어! 새해 복 많이 받게나, 병아리 군.”
“자네도, 해피 뉴이어!” 그리고 병아리 군은 차창을 모두 내렸다. 서늘한 바람이 차 안으로 몰아쳤다. 붕붕 바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지금 여기, 이것. 바람을 맞으며 그는 생각했다. 원래 있던 것, 태어날 때 자신이 가지고 온 것, 지금 여기, 이것. 이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있었다. 평생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았는데, 자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비로소 그는 알게 됐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는 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지금 여기,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