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대로 연주한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수, 다니엘 하리토노프[리뷰]
입력
수정
다니엘 하리토노프, 8일 내한 리사이틀지난 8일 푸르지오아트홀에서 열린 다니엘 하리토노프 리사이틀. 푸르지오아트홀 제공
라흐마니노프·블루멘펠트 등
광활하고 격정적...
'러시아 피아니즘 정수' 보여줘
'생긴대로 연주한다'는 말이 있다. 음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여기에서 '생긴대로'는 단순히 얼굴 생김새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외모를 비롯해 말투, 걸음걸이, 습관 등 연주자의 전체적인 모습을 말한다. 품새가 반듯한 지, 표정이 밝은 지 등이 실제 연주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게 얘기다.지난 8일 서울 을지로 푸르지오아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다니엘 하리토노프(25)의 리사이틀도 그랬다. 큰 키에 선이 굵은 '러시아 미남' 하리토노프는 광활하고 격렬한 연주로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수를 보여줬다. 반면, 고요하고 세심한 면모는 덜 부각됐다. 280여 석의 소규모 공연장은 90여분간 그가 내뿜은 에너지로 가득찼다.
하리토노프는 체력이 받춰줘야만 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짰다. 1부에서는 쇼팽 에튀드 25번 12곡과 3개의 작은 에튀드, 리스트 헝가리안 랩소디 6번을 연주했다. 2부에서는 라흐마니노프와 블루멘펠트, 보로딘 등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집중력과 지구력이 없으면 완주하기 힘든 '메뉴'들이다. 동시에 테크닉이 떨어지면 도전조차 할 수 없는 화려한 곡들이기도 하다.
1부에서 들려준 하리토노프의 쇼팽은 서정적이기보다는 호전적이었다. 그는 루바토(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를 최소화하고 직선적인 스타일로 12곡의 쇼팽 에튀드를 연주했다. 때때로 급해지거나 투박할 때도 있었지만 '원석'처럼 젊고 에너지 넘치는 쇼팽을 들려줬다. 12곡을 연달아 연주했는데도, 그는 이제 막 손가락을 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버거워 보이는 느낌은 없었다.그의 진가는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작곡가의 작품에서 드러났다. 라흐마니노프는 하리토노프의 '최애' 작곡가다. 그는 서면 인터뷰를 통해 "어릴 때부터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깊이와 풍요로움에 매료됐다"고 했다.
하리토노프는 라흐마니노프의 12개 노래 중 라일락을 통해 서정적인 선율과 겹겹이 쌓여가는 화성을 풍부하게 표현했다. 셋잇단음표 음형이 곡 전체에 등장하는 이 곡은 서정적이고 그리움이 가득한 곡이다. 임윤찬을 비롯해 여러 피아니스트들이 앙코르곡으로 연주해 국내 청중들에게도 친숙한 곡이다. 사진=푸르지오아트홀 제공하리토노프는 일반 관객들에겐 생소한 블루멘펠트의 전주곡도 선보였다. 펠릭스 블루멘펠트(1863-1931)는 20세기 초반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쇼팽, 바그너 등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거장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길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하리토노프는 블루멘펠트의 곡을 통해 러시아의 민족적 선율을 짙게 표현했다. 블루멘펠트의 전주곡은 라흐마니노프 등 다른 러시아 작곡가에 비해 단순한 구조와 이국적인 선율이 매력적이었다. 평소 접하기 힘든 곡이 주는 신선함에 관객들은 매료됐다.
마지막은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 왕자' 중 '폴로베츠인들의 춤'으로 장식했다. 그는 이 곡을 자신이 편곡한 버전으로 연주했는데, 기존 버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화려했다. 말 그대로 '생긴대로 연주한' 미남 피아니스트에게 건넨 한국 관객들의 박수 소리는 크고 길었다. 앞으로 예술의전당 같은 더 큰 무대에서 그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