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장 화려하고 가장 어두운 순간을 함께한 꽃, 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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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홍지수의 공예 완상백자 청화 모란문 병(白磁靑畵牡丹文甁), 조선, 높이33cm,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인의 길과 흉사를 함께 해 온 꽃
산 자의 행복 기원하고 망자의 평안을 바라는 의미
조선시대 궁궐 건축과 각종 의례, 공예품에서 차용
허상욱 작가 등 현대 공예가들도 모란의 매력 알려
어느덧 만물 출생의 봄을 지나 성장의 여름 문턱에 서 있다. 입하와 소만, 두 절기 사이. 바깥은 온통 다채로운 꽃들이 내뿜는 생기로 싱그럽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꽃은 당연코 ‘모란’이다. 꽃 모양이 비슷해서인지 작약과 모란을 같은 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나 꽃과 잎, 줄기의 생김새가 다르다. 작약은 풀이요, 모란은 나무다. 아무리 요즘 5월 신부들의 로망이 ‘작약 부케’라지만, 원래 한국인의 길과 흉사를 함께 해 온 꽃은 ‘모란’이다. 모란의 다른 이름은 목작약, 목단이다. 북송(北宋)시대 학자였던 주돈이(周敦頤, 1017-1073)는 저작「애련설(愛蓮說)」에서 “당나라 이래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사랑하였는데, 모란이 꽃 중의 부귀다.”라고 하였다. 이후로도 모란은 오랫동안 번영과 창성(昌城)의 꽃이요, 미호(美好)와 행복의 상징이었다.
모란은 꽃봉오리일 때는 동그란 모양을 유지하다가, 꽃이 피기 시작하면 화형이 크게 벌어지며 겹꽃 속에 수북한 노란 수술을 보여준다. 흡사 금화가 가득 든 붉은 비단 주머니를 보는 것 같다. 옛 여인들이 붉은 천으로 복주머니를 짓고 그 위에 금실로 수(壽), 복(福), 부(富), 귀(貴) 등을 상징하는 글자와 무늬를 수놓아 가족들로 하여금 지니게 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물상의 유사함에 착안한 것은 아닐까?모란도(牡丹圖)병풍도, 조선, 종이 위 채색, ©국립중앙박물관모란의 형상이 좋은 뜻과 미인을 연상시키는 화려함을 두루 갖춘 꽃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우리 미술, 공예에는 모란을 그린 예가 적지 않다. 모란을 여인들의 전유물로 오해하기 쉬우나, 궁궐 정전(正殿) 왕이 자리하는 어좌(御座)와 어좌 뒤에 세우는 곡병(曲屛), 어좌 위쪽을 장식하는 지붕 모양의 당가(唐家)를 보면 궁중 화원들이 그린 모란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궁궐 건축물과 각종 의례, 공예품 전반에서 모란을 사용했다. 이때 모란은 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모란도(牡丹圖)병풍도(세부), 조선, 종이 위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복, 부귀와 풍요를 비는 마음이 민간이라고 다르랴. 조선시대에 모란은 혼인과 같은 길례 뿐 아니라 흉례에도 함께였다. 신분 가릴 것 없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에 입는 혼례복인 활옷은 길상을 상징하는 붉은 자색 바탕에 앞뒤 모란을 비롯해 연꽃, 복숭아, 매화, 석류, 국화, 나비 등을 한 땀 한 땀 곱게 수놓았다. 이 밖에도 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혼례용 부채, 가마 등에도 붉은 석류빛 모란을 볼 수 있다. 장례 혹은 제사 등 망자(亡者)의 시체 혹은 혼이 자리할 곳에도 모란도 병풍을 둘렀다. 흉례는 인간사 가장 큰 슬픔이기도 하지만 죽은 이의 안식을 빌고 이생의 남겨진 자들의 기복을 비는 위로의 자리이기도 하다. 망자가 생전처럼 내세에서도 풍요롭게 살기를 기원하고 조상신이 되어 부디 후대를 굽어살펴 주길 바라는 만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현대 공예가들도 여전히 모란을 즐겨 사용한다. 그저 작품으로만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작업집 주변에 모란을 식재하고, 개화하길 기다렸다 소식을 전해온다. 그중에서도 허상욱 작가의 양평 작업실 앞마당에 핀 모란 개화 소식은 유독 특별하다. 허상욱 작가는 오래전부터 여느 작가들보다 분청의 재료와 수법을 운용해 모란을 즐겨 그려왔다. 그가 모란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오래 모란을 즐겨 그리고 자주 그리다 보니 주로 사용하는 박지기법(剝地技法, 문양 이외의 배경 부분의 백토를 긁어낸 뒤 투명한 회청색의 유약을 발라 문양과 배경의 대비를 이루게 하는 문양 기법)과 함께 작가를 대표하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허상욱, 분청사기박지모란당초문편병, 2022, 사진 : 작가제공
나는 십 수년간 전시와 작가의 작업실을 다니며 작가가 그린 모란 작업의 변천을 지켜보아 왔다. 작업 초기에는 옛 고전을 참조하여 찻사발을 비롯해 컵, 합(盒), 편병(扁甁), 항아리(壺), 도판(陶板)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물에 ‘도안으로서 모란’을 그렸다. 그러나 점차 작가는 옛 고전을 참조하되 외양보다는 그 안에 담긴 진아(眞我) 혹은 자신의 흉중(胸中)에 있는 독자적인 모란을 추구하게 되었다. 최근 그는 갤러리 완물에서 연 개인전에서 평소 용기 표면에 붓이나 도칼(陶刀)로 그리던 모란을 잠시 내려놓고 손 가는 데로 흙 주물러 시공간 속에 새로운 유형의 입체꽃을 피웠다. 이리 보면 꽃이요, 달리 보면 구름 같기도 한, 한편 포물선 겹친 형태가 멀리 내다보는 산세 겹침으로도 보이기도 하는 불이적(不二的) 형상이다. 허상욱, 수수생춘(隨手生春), 2023, 갤러리완물 ⓒKC Studio
허상욱의 표현뿐 아니라 우리 공예가들이 기물과 수법을 달리한 모란 표현을 감상하다 보면, 도자기 속 모란이 그림, 도안이 아니라 마치 사람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줄기를 양팔처럼 뻗고 들어 올린 모란이 내게 두 팔로 하트를 그리며 “사랑해요!” 혹은 “부자 되세요!” 말하는 것 같다. 문자도 아니고 그저 도안일 뿐이나, 보는 동안 좋은 메시지와 기운이 내게 전해지고 미소도 절로 지어지는 것을 보니, 작가 역시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녕과 복을 바라며 모란을 그리지 않았을까. 아마도 후일 그것의 주인이 될 이의 마음도 나 그리고 작가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이후 길상에 벽사 의미까지 더해져 각종 생활용품과 공예, 건축물 등의 장식에 두루 쓰인 모란이 이 시대 공예가의 창의와 재기, 공력에 힘입어 새로운 우리 시대 표현으로 새 꽃을 피우고 있다. 도심 속 아파트 생활이 일반화된 요즘, 모란을 보기도 기르기도 쉽지 않다. 모란을 기르던 옛 풍습은 사라졌지만, 이 계절 어느 꽃보다 탐스럽고 색이 화려하고 기품이 있는 모란을 즐길 방법은 여전히 많다. 공예가가 모란을 소담스럽게 그린 화병이나 가구를 보며 감상해도 좋고, 모란이 그려진 차도구 세트에 햇차를 내려 마셔도 좋다. 친구와 함께 모란이 그려진 우리 한복을 차려입고 고궁 건물 곳곳에 자리한 모란 문양과 생화를 보물찾기하듯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그조차 힘들다면 집 안에서, 손 안 핸드폰에서도 얼마든지 오월 꽃구경할 수 있다.
한국 공예가 시절을 거듭해 다양하게 피운 모란의 아름다움, 상서로움, 간절한 기원이 책과 온라인 안에도 지천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모란을 화조화의 화제(畫題)로, 공예 문양으로 애호하며 가까이 두었던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과 즐김이 시대가 달라졌다가 한들 지금 우리와 다를 바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