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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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은아의 머글과 덕후 사이최근 클래식 음악과 관련해 나름의 큰 화제가 된 영상이 있다면 단연 KBS교향악단의 유튜브 채널에 게재된 “[긴급] 중요한 공연중 팀파니가 찢어졌습니다”일 것 같다. KBS교향악단이 엘리아후 인발 지휘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1905년'을 연주하던 도중 일어난 사건이다.
팀파니의 장쾌한 스트라이크가 최대 하이라이트를 만들어 내는 곡이다. 2악장 바로 그 부분의 연타 도중 네 대의 팀파니 중 한 대가 찢어져버렸다. 팀파니 수석의 순간적인 대처로 연주는 계속됐지만 사건을 겪은 팀파니스트와 타악기 섹션 연주자분들은 얼마나 정신이 아득했을지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화제에 힘입어(?) 같은 채널에 ‘팀파니 그 공연'이라는 유쾌한 제목으로 전곡 연주가 기록됐다. 실황 연주를 찾다보면 심심치 않게 이런 류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내가 겪은 돌발 상황은 연주 도중 악장의 현이 끊어진 일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커리어를 쌓고 있는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갱이 2017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한 공연에서 일어난 일이다.
협연자로 나선 데이비드 김이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던 중이었다. 3악장의 활기차고 유머러스한 멜로디가 이어지는 도중 협연자 악기의 현이 끊어진 것이다.(바이올린 현이 끊어질 때는 생각보다 굉장히 크게 ‘탕!’하는 소리가 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후의 대처는 정말 놀라웠다. 찰나의 순간, 협연자랑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수석 연주자(악단의 부악장이었다고 한다)가 즉각 본인의 악기를 협연자에게 건넸고, 데이비드 김은 곧장 그 악기로 곡의 피날레를 향해 씽씽 나아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도, 그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도 나에게 아직까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비슷한 사건은 서울시향 연주에서도 일어났다. 연주 도중 악장의 현이 끊어졌는데, 악장은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연주자의 악기를 건네받아 연주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현 파트의 가장 뒷줄에 앉아 있는 연주자의 악기가 그 앞 연주자에게, 그 앞 연주자의 악기는 또 앞의 연주자에게 전달되고, 현이 끊어진 악기는 역 순으로 가장 뒷자리 연주자에게 전달되어 그가 무대 밖으로 가지고 나가 현을 교체해 왔다.
돌발상화에 대응하는 나름의 프로토콜이 있는 셈이다. 작년 11월 빈 필하모닉 내한 연주회에서도 이 악단의 프로토콜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현 파트의 두번째 줄 의자에 여벌의 악기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해당 연주회에서 다행히 이 비상용 악기를 써야 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직접 찍은 사진. 2022년 11월 5일 롯데콘서트홀)연주자가 틀린 프레이즈를 연주하는 일도 드물지만 일어난다. 이번에도 KBS교향악단의 연주였다. 지휘자 정명훈과 함께 재단법인 출범 10주년을 기념하는 정기연주회였다. 협연자였던 피아니스트 벤저민 그로브너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고요하면서도 서정적으로 잘 그려나갔다. 그의 연주의 맑은 음색이 수채화처럼 퍼져나갔고, 이 피아니스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이유도 잘 알 수 있었다.
사건은 곡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 일어났다. (머글이라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8마디 정도는 틀린 조성으로 연주가 이어진 것이다. 의아했던 10여초였다. 하지만 그 날의 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2부 프로그램이었던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에서 곡이 진행되는 내내 오르간 연주자의 악보가 무대 위의 바람에 흩날렸던 것이다.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도 초조했다.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무대 구석으로 날아가버린 악보를 오르가니스트 신동일이 직접 잡아 오기도 하고, 그가 연주하는 동안에는 근처에 앉아 있던 피아노 연주자가 틈틈이 악보를 붙잡아 준 덕분에 환희의 오르간 사운드는 무사히 홀을 울릴 수 있었다.(직접 찍은 사진. 2022년 9월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예상 밖의 사건들도 있다. 2017년 서울시향이 지휘자 마르쿠스 슈텐츠와 함께 브루크너 7번을 연주했던 때였다. 밀림처럼 빽빽하게 우거진 음표의 향연 속에서 현악기 주자들의 팔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쉴새없이 보잉이 이어졌고 바그너튜바 네 대와 트럼펫, 팀파니의 사운드까지 더해져 연주장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던 명연주가 빚어졌다.
이 연주회에서 첼로 섹션 가장 마지막 줄에는 그 날의 협연자로 1부 무대에 올라 슈만의 첼로협주곡을 연주한 알반 게르하르트가 앉아있었다. 협연자로 선보인 그의 슈만은 나긋하고 촉촉하기 그지없었으나 서울시향 객원 첼로단원(?)으로서 악단의 일부가 되어 함께 연주한 브루크너 7번은 정말 사납고, 야성적이고 동시에 소스라칠 정도로 날카로웠다.
또 하나의 기억은 관객에게 신청곡을 받아 앵콜을 연주한 경우다. 2018년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마한 에스파하니의 하프시코드 독주회에서였다. 하프시코드로 듣는 바흐의 골트베르크는 그 자체로 특별했지만 이 곡을 연주하면서 보여준 에스파하니의 탐구정신은 놀라웠다.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 비행사같았다. 고요한 가운데 날카롭고 성스럽게 피어오르는 하프시코드의 음색에 마침내 매료될 즈음 앵콜의 시간이 다가왔고, 그는 관객이 원하는 곡을 쳐주겠다고 말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어떤 분이 “스카를라티!”를 외치자 바로 “스카를라티!”라고 화답했다. 바로크 연주곡, 특히나 하프시코드 연주곡을 즐겨 듣지 않았지만 이 연주회 이후 꽤 오랫동안 찾아 들었고, 관객이 청한 곡을 연주 곡목의 일부로 적극 편입시켜준 것이 고마워 마한 에스파하니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기도 했다. 각종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연주자들을 볼 때마다 인간적인 모습, 직업인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되어 한편으로는 동질감이 느껴진다. 관객에게는 일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일 수 있지만 수십번, 수백번 무대에 오르는 베테랑 연주자들에게는 그리 놀랍지 않은 해프닝이 아닐까?
또 이런 사건이 관객에게도 연주자에게도 해당 연주회를 오랫동안 추억하게 되는 자양분이 되기도 하니 마냥 나쁜 것만도 아니다. 알반 게르하르트나 마한 에스파하니가 또 내한하게 된다면 꼭 연주회장을 찾을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