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미·중 패권경쟁에 웃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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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효 도쿄 특파원미국 프로야구 최하위 리그인 루키리그에 막 입성한 선수가 있다. 스스로도 “메이저리그와의 격차는 20년 정도”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이 선수는 4년 내 오타니 쇼헤이의 최고 구속을 뛰어넘고, 메이저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인 애런 저지의 홈런 기록을 깨겠다고 공언한다. 메이저리그 스타 집안 출신이라는 점과 최고급 야구 방망이와 글러브를 갖고 있다는 점 등이 자신감의 근거다.일본 정부와 대기업들이 ‘사무라이 반도체의 부활’을 내걸고 작년 8월 설립한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의 상황을 야구에 빗댄 얘기다. 1988년 일본 반도체는 세계 시장의 50.3%를 차지한 메이저리그의 슈퍼스타였다. 오늘날 점유율은 10%까지 떨어졌다.
"20년 격차 따라잡겠다"
현재 일본이 만들 수 있는 반도체는 40㎚(나노미터·1㎚=10억분의 1m)급이다. 히가시 데쓰로 라피더스 회장은 최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3㎚급 양산을 시작한 삼성전자와 TSMC에 비해 20년 정도 뒤처졌다”고 평가했다.하지만 라피더스는 2027년 2㎚급, 2030년대 초반에는 삼성전자와 TSMC도 못 한 1㎚급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텔로부터 전수하기로 한 반도체 제조 기술에 세계 최고 수준인 자국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접목하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라피더스는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까지 총 5조엔(약 46조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하는데 일본 정부의 보조금은 3300억엔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라피더스가 성공을 자신하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미·중 패권 경쟁을 빼놓고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첨단 반도체의 85%를 생산하는 한국, 대만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을 경우 불똥이 튈 수 있는 지역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부터 업계에서는 반도체 생산 능력의 상당 부분을 상대적으로 안전한 일본으로 옮겨 유사시에 대비한다는 시나리오가 돌기 시작했다.
미·중 마찰은 日 반도체 부활 기회
음모론 정도로 취급됐던 시나리오는 1년이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일본은 세계 1~3위 반도체 기업인 TSMC, 삼성전자, 인텔의 생산 공장 및 연구개발(R&D) 거점을 모두 자국에 유치했다. 인텔은 자신들도 아직 본격적으로 양산하지 못한 1~2㎚ 최첨단 반도체 기술을 라피더스에 전수하기로 약속했다. 미국과의 사전 조율 없이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6·25전쟁 당시 일본은 막대한 전쟁 특수를 누리며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에서 세계 2대 경제 대국으로 부활했다. 그로부터 70년 후 일본이 이번에는 미·중 패권 경쟁을 기회로 삼아 다 죽어가던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노림수를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7일 “선진국들이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 공급망을 이전하려는 상황에서 일본의 매력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일본의 반도체 정책을 담당하는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은 지난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전자, TSMC와 경쟁하고 싸워나가야 하는 부분도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라피더스의 도전에 한국이 긴장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