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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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물리쳐보자며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국책 가요가 나온 게 1962년이다. 그리고 그게 ‘몰라보게 좋아졌네’라는 노래로 바뀐 게 딱 10년 후인 1972년이다. 10년 만에 좋아졌다. 그것도 눈에 띌 정도로. 인류 역사상 이런 나라는 없었다.
또 10년여 시간이 흐른 1983년, 이번에는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도시엔 우뚝 솟은 빌딩들’이라는 구체적인 성과를 담은 노래까지 등장한다(인류 역사상 앞으로도 이런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빨리빨리’의 민족이다. 뭐든 급하게 빨리해야 직성이 풀린다. 다른 나라에서는 100년 걸렸다는 근대화를 20년 만에 끝냈고 헌정질서 그딴 게 뭐 중요하냐며 임기가 남은 대통령도 끌어내린다(적당한 사례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점도 있다. 급하니까 빨리하고 빨리했으니 건너 뛴 공정 끝에 다리가 끊기고 백화점이 무너졌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는 나라였으니 한동안 우리는 일종의 전 국민적 정신분열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조급증이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는 사실이다. 불과 40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사태’의 성격을 완전히 정리했고 이제는 그걸 헌법 전문에 넣자는 얘기까지 나온다. 역사는 그 일과 몸으로 엮인 사람들이 세상을 다 떠나야 그때부터 역사다. 특별히 손해 볼 사람도 없고 덕 볼 사람 역시 없어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진다는 말씀이다. 역사의 반대말이 기억인 이유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적어도 한 세기는 지나서야 명칭이 붙고 의미가 명확해진다. 기원 전 3세기에서 2세기까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른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유행했던 르네상스도 19세기 중반에야 이름표를 달 수 있었다.
14세기에 시작해서 15세기에 끝난 백년전쟁도 마찬가지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프랑스 땅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자의적으로 편집해 하나의 명칭으로 묶은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100년 전쟁은 왕위 계승 갈등이 명분이자 이유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경제사가들은 이 전쟁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자신들의 주 종목인 경제를 통해서다. ▲100년 전쟁의 히로인 잔 다르크. 그녀를 오늘날의 잔 다르크로 만든 것은 나폴레옹이다. 잔 다르크는 동레미 출신으로 이곳은 프랑스의 정식 영토가 아니다. 자치구에 가까운 마을이었고 프랑스인도 아닌 소녀가 프랑스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것을 정통 프랑스인이 아닌 코르시카 출신 나폴레옹이 구국의 길에 나선 것과 겹쳐 보이도록 포장했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 세계와 오리엔트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집트, 중동 지역과 교역이 이루어졌고 이 무역은 12세기 유럽과 지중해 세계에 유래 없는 호경기를 선물한다. 인구와 시장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유럽에 두 개의 마켓이 생겨난다. 뤼베크(북독일), 플랑드르(벨기에)를 중심으로 한 북쪽 마켓과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남쪽 마켓이다.
자연스럽게 남북 마켓이 연결되면서 이 루트를 따라 아우크스부르크 등 남독일 도시들이 성장했는데 문제는 이 아울렛(유통 판로)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시기와 재정적인 결핍 끝에 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재정적인 이익을 발생시키는 고전적인 패턴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 게 100년 전쟁이라는 설명인데 충분히 타당한 주장이다.100년 전쟁에서 유심히 봐야 하는 지역이 북부 마켓의 플랑드르다. 토양이 척박한 영국은 목축이 발달했고 여기서 생산된 양모는 기술 강국 플랑드르에 수출되어 고급 모직물 제품으로 재탄생한다. 그러니까 영국과 플랑드르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하나의 생산 공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셈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전쟁터가 된 조국을 떠나 플랑드르 모직업자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의 위협도 없고 양모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송비용도 절감할 수 있었으니 이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플랑드르의 기술과 자본이 옮겨오면서 생산의 원스톱 공정이 완성되었고 영국은 원료 수출국에서 제품 수출국으로 위상이 바뀐다. 숫자로 단순화시켜 보면 전쟁 개시 무렵 1이었던 모직물 제품 수출은 전쟁이 끝날 즈음 180이 되었고 300이었던 양모 수출량은 80으로 줄었다. 전형적인 후진국에서 선진적인 무역 국가가 된 것이다.
영국은 슬슬 전쟁이 귀찮아진다. 쓸데없이 나가는 거액의 군사비도 아깝다. 설렁설렁 전쟁을 치르면서 퇴각할 궁리를 하는 상대만큼 만만한 것도 없다. 1436년 샤를 7세는 파리를 수복했고 1450년에는 노르망디를, 1453년에는 노른자 지역인 기옌(아키텐)을 되찾는다. 프랑스는 승리를 외쳤지만 이 주장은 정치적으로만 그럴 듯할뿐 경제적으로는 심하게 부실하다. 전쟁에서 진 국가가 패전 후 더 부강해진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영국의 경제적 도약과 플랑드르 지방의 쇠퇴를 설명하기에 앞뒤가 매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당대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 어쩌면 그게 역사다. 우리는 좀, 많이, 심하게 급하다. 그럼 손 놓고 시간이 가기만 기다리자는 얘기? 아니다. 훗날의 평가를 위해 충분히 자료를 모으는 게 당장의 할 일이다. 이것도 부실한 상태에서 벌써 판단을 내리고 있으니 그게 딱할 뿐이다.
또 10년여 시간이 흐른 1983년, 이번에는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도시엔 우뚝 솟은 빌딩들’이라는 구체적인 성과를 담은 노래까지 등장한다(인류 역사상 앞으로도 이런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빨리빨리’의 민족이다. 뭐든 급하게 빨리해야 직성이 풀린다. 다른 나라에서는 100년 걸렸다는 근대화를 20년 만에 끝냈고 헌정질서 그딴 게 뭐 중요하냐며 임기가 남은 대통령도 끌어내린다(적당한 사례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점도 있다. 급하니까 빨리하고 빨리했으니 건너 뛴 공정 끝에 다리가 끊기고 백화점이 무너졌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는 나라였으니 한동안 우리는 일종의 전 국민적 정신분열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조급증이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는 사실이다. 불과 40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사태’의 성격을 완전히 정리했고 이제는 그걸 헌법 전문에 넣자는 얘기까지 나온다. 역사는 그 일과 몸으로 엮인 사람들이 세상을 다 떠나야 그때부터 역사다. 특별히 손해 볼 사람도 없고 덕 볼 사람 역시 없어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진다는 말씀이다. 역사의 반대말이 기억인 이유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적어도 한 세기는 지나서야 명칭이 붙고 의미가 명확해진다. 기원 전 3세기에서 2세기까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른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유행했던 르네상스도 19세기 중반에야 이름표를 달 수 있었다.
14세기에 시작해서 15세기에 끝난 백년전쟁도 마찬가지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프랑스 땅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자의적으로 편집해 하나의 명칭으로 묶은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100년 전쟁은 왕위 계승 갈등이 명분이자 이유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경제사가들은 이 전쟁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자신들의 주 종목인 경제를 통해서다. ▲100년 전쟁의 히로인 잔 다르크. 그녀를 오늘날의 잔 다르크로 만든 것은 나폴레옹이다. 잔 다르크는 동레미 출신으로 이곳은 프랑스의 정식 영토가 아니다. 자치구에 가까운 마을이었고 프랑스인도 아닌 소녀가 프랑스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것을 정통 프랑스인이 아닌 코르시카 출신 나폴레옹이 구국의 길에 나선 것과 겹쳐 보이도록 포장했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 세계와 오리엔트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집트, 중동 지역과 교역이 이루어졌고 이 무역은 12세기 유럽과 지중해 세계에 유래 없는 호경기를 선물한다. 인구와 시장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유럽에 두 개의 마켓이 생겨난다. 뤼베크(북독일), 플랑드르(벨기에)를 중심으로 한 북쪽 마켓과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남쪽 마켓이다.
자연스럽게 남북 마켓이 연결되면서 이 루트를 따라 아우크스부르크 등 남독일 도시들이 성장했는데 문제는 이 아울렛(유통 판로)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시기와 재정적인 결핍 끝에 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재정적인 이익을 발생시키는 고전적인 패턴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 게 100년 전쟁이라는 설명인데 충분히 타당한 주장이다.100년 전쟁에서 유심히 봐야 하는 지역이 북부 마켓의 플랑드르다. 토양이 척박한 영국은 목축이 발달했고 여기서 생산된 양모는 기술 강국 플랑드르에 수출되어 고급 모직물 제품으로 재탄생한다. 그러니까 영국과 플랑드르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하나의 생산 공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셈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전쟁터가 된 조국을 떠나 플랑드르 모직업자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의 위협도 없고 양모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송비용도 절감할 수 있었으니 이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플랑드르의 기술과 자본이 옮겨오면서 생산의 원스톱 공정이 완성되었고 영국은 원료 수출국에서 제품 수출국으로 위상이 바뀐다. 숫자로 단순화시켜 보면 전쟁 개시 무렵 1이었던 모직물 제품 수출은 전쟁이 끝날 즈음 180이 되었고 300이었던 양모 수출량은 80으로 줄었다. 전형적인 후진국에서 선진적인 무역 국가가 된 것이다.
영국은 슬슬 전쟁이 귀찮아진다. 쓸데없이 나가는 거액의 군사비도 아깝다. 설렁설렁 전쟁을 치르면서 퇴각할 궁리를 하는 상대만큼 만만한 것도 없다. 1436년 샤를 7세는 파리를 수복했고 1450년에는 노르망디를, 1453년에는 노른자 지역인 기옌(아키텐)을 되찾는다. 프랑스는 승리를 외쳤지만 이 주장은 정치적으로만 그럴 듯할뿐 경제적으로는 심하게 부실하다. 전쟁에서 진 국가가 패전 후 더 부강해진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영국의 경제적 도약과 플랑드르 지방의 쇠퇴를 설명하기에 앞뒤가 매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당대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 어쩌면 그게 역사다. 우리는 좀, 많이, 심하게 급하다. 그럼 손 놓고 시간이 가기만 기다리자는 얘기? 아니다. 훗날의 평가를 위해 충분히 자료를 모으는 게 당장의 할 일이다. 이것도 부실한 상태에서 벌써 판단을 내리고 있으니 그게 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