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심장에 '숯덩이'…슈퍼 컬렉터 '말 한마디'로 시작됐다

록펠러센터 한국작가 전시 ‘Origin, Emergence, Return’
이배·박서보·진 마이어슨·윤종숙 등 4명 참여

록펠러센터 소유한 메가 컬렉터 '제리 스파이어'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진 마이어슨에 먼저 제안

진 마이어슨 "한국 현대 미술 본질 보여주자"
단색화에서 AR 접목한 회화까지 총출동
“내년 여름에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한국 문화를 홍보하는 축제를 열 겁니다. 한국 예술가들이 얼마나 깊이가 있는지 뉴요커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어때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2년, 록펠러센터를 소유한 글로벌 부동산운용사 티시만스파이어의 공동창립자이자 ‘메가 컬렉터’인 제리 스파이어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진 마이어슨(51)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2004년 스파이어에게 판매한 작품을 보수해주기 위해 마이어슨이 잠시 미국에 들렸던 때였다. 한국 입양아 출신인 마이어슨의 머릿속에 ‘한국 현대 미술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란 생각이 스쳤다. 마이어슨은 스파이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요즘 뉴욕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국 작가들의 전시 ‘기원, 출현, 귀환(Origin, Emergence, Return)’는 이렇게 시작했다. 마이어슨의 소속 갤러리인 조현화랑이 기획한 이 전시는 7월 26일까지 록펠러센터 내 링크레벨 갤러리와 야외 정원에서 열린다.

전시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이배(67)가 록펠러센터 가운데 설치힌 높이 6.8m의 거대한 숯덩이 조각 때문. 하지만 그렇게만 바라보기엔 아깝다. 이 전시는 총 세 가지 파트로 이뤄져있는 그룹전이다. 박서보(기원), 이배(출현), 마이어슨·윤종숙(귀환) 등 네 명의 예술가가 각 파트를 맡았다. 미국의 ‘심장부’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조명하는 전시를 자세히 뜯어봤다.
‘선’으로 韓 현대 미술을 열다, 박서보첫 번째 ‘기원’ 파트의 주인공은 ‘단색화 거장’ 박서보(92)다. 20대부터 70년간 단색화를 고집해온 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단연 ‘묘법(Ecriture)’. 프랑스어로 ‘쓰는 행위’란 뜻의 제목처럼 선을 긋고, 물감으로 지우고, 그 위에 또 선을 긋는 행위를 반복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엔 붉은색, 연보라색 등 다양한 시기에 제작된 묘법 연작 40여 점이 등장했다.

박서보의 묘법을 찬찬히 눈에 담다 보면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되짚어볼 수 있다.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그 위에 연필선을 반복해서 그린 초기작부터 강렬한 색채와 한지의 질감을 더한 최신작까지, 재료의 물성에 대한 탐구를 수십 년간 진득하게 이어온 그는 한국 현대 예술가들에게 ‘본보기’가 됐다. 박서보가 한국 현대미술의 헤리티지를 보여주는 전시에서 ‘기원’ 파트를 맡게 된 이유다.
그의 작품은 동양미술의 정수이기도 하다. 마치 스님이 염불을 외듯 끊임없이 선을 긋는다. ‘붓을 떼는 순간 작품은 끝’이라는 서양미술의 방법론을 넘어, 박서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반복되는 순환정신을 작품에 담았다. 이번 전시에선 삼성 발광다이오드(LED) 디스플레이를 통해 박서보의 묘법을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영원을 담은 6.5m 숯덩어리, 이배

박서보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이끈 인물이라면, 이배는 그 뒤를 이어 한국 미술을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은 예술가다. 그의 별명은 ‘숯의 작가’. 수백, 수천년의 시간을 응축한 숯을 활용해 조각을 만들고, 그 안에 영원의 시간을 담았다.

이번에도 그는 숯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록펠러센터 건물 밖 ‘채널 가든’에 설치된 높이 6.8m, 무게 3.6t의 숯 조각 ‘불로부터(Issu du Feu)’다. 그가 맡은 두 번째 파트 제목인 ‘출현’처럼, 거대한 숯 덩어리는 뉴욕의 빌딩숲 사이에 우뚝 일어섰다. 이배는 현지에서 열린 아티스트 토크에서 “인류의 가장 화려한 정신적 결과물인 도심 한복판에 숯을 세움으로써 자연으로의 순환과 정화를 나타냈다”고 했다.
전시장 안에선 그가 평면에 담은 숯도 볼 수 있다. 절단한 숯 조각을 캔버스에 타일처럼 붙인 작품이다. 오묘하면서도 깊은 숯의 색깔을 통해 ‘심연의 빛’을 나타냈다. 숯가루가 섞인 먹물로 붓질을 한 ‘붓질(Brushstroke)’ 작품도 있다.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가들, 마이어슨·윤종숙

한국 미술이 꼭 한국에서 자란 사람들에 의해서만 발전한 건 아니다. 세 번째 파트 ‘귀환’을 맡은 마이어슨과 윤종숙(58)이 그런 사람들이다. 인천에서 태어난 후 네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마이어슨은 뉴욕, 파리, 홍콩, 자카르타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하다가 몇 년 전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입양아로서의 정체성, 세계 곳곳을 다니며 겪었던 경험 등을 대형 회화로 그린다.
마이어슨의 작품은 여느 회화와는 다르다. 구상과 추상, 수작업과 컴퓨터 작업을 모두 아우른다. 그는 잡지에 나온 이미지나 사진을 포토샵으로 왜곡한 후 캔버스에 그린다. 이번 전시에선 한 발짝 더 나아갔다. 회화에 증강현실(AR) 기술을 접목했다. 핸드폰으로 작품을 찍으면 숨겨진 QR코드를 통해 캔버스 위에 레이어드된 붓질이 3차원 공간 속에서 되살아난다.
▲윤종숙 'Way Up'

30년째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종숙은 한국의 자연풍경과 독일의 표현주의를 합쳤다. 록펠러센터 내 사이먼 앤드 슈스터 빌딩 로비에서 회화 작품 3점을 선보였다. 작품을 보면 동양 전통의 수묵화와 독일 특유의 거친 표현주의가 동시에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전시는 7월 26일까지 열린다.


한국계 미국인 진 마이어슨… "한국 문화의 본질은 한(恨)"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열리는 한국 작가들 전시 ‘기원, 출현, 귀환’의 참여 작가 리스트를 보면 익숙한 한국인 이름 사이에 낯선 외국인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진 마이어슨’이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미국 미네소타주에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이다. 예술가가 된 후 세계 16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작업하다가 몇 년 전 한국인과 결혼하며 한국에 정착했다.

자연스럽게 이런 궁금증이 떠오른다. “한국보다 미국에서 지낸 기억이 더 많을텐데, 왜 한국 미술의 헤리티지를 되돌아보는 전시에 참여한 걸까?” 뉴욕 전시를 앞둔 지난달 말, 서울 문래동 작업실에서 마이어슨을 만나 직접 물었다. 그는 “한국보다 일본에 더 오래 산 이우환도, 프랑스에서 30년간 살았던 이배도 모두 한국 작가이듯, 중요한 건 한국에 얼마나 있었느냐가 아니다”라며 “한국 문화의 본질은 ‘한(恨)’”이라고 했다.
▷스스로 한국 예술가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이우환을 생각해보라.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20대 때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줄곧 활동했다. 그렇다고 이우환을 빼놓고서 한국 현대미술사를 논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나고 자란 것보다는 그 안에 담긴 게 중요하다. 나는 그게 바로 ‘한’이라는 공통적인 정서라고 생각한다.”▷당신의 작품에도 ‘한’이 반영돼있나.
“입양아로서 항상 ‘내가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갖고 살았다. 거기다 내가 뉴욕에서 작가생활을 시작했던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아시안 예술가는 거의 없었고, 회화는 이미 ‘한물 지나간 것’으로 여겨졌다. 그 속에서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전문가가 아니면 쓰지 않았던 포토샵을 작품에 적용했다. 독특한 작품은 이런 고민의 결과다.”

▷뉴욕에서 선보인 신작은 어떤가.
“이번 작업은 나와 아내, 딸이 천을 뒤집어쓰고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다각도로 찍어서 왜곡한 뒤 캔버스에 옮긴 것이다. 이 그림을 핸드폰으로 찍으면 그림 속에 숨겨진 QR코드를 통해 붓의 레이어와 스케치를 증강현실(AR)로 볼 수 있다. 마치 그림의 ‘출생 기록(birth record)’ 같은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고, 가져볼 일이 없는 출생 기록을 내 그림에 부여하고 싶었다.” 이선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