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우상(偶像)과 망령(亡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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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급 위안스카이' 앞에서 벌인<슬픈 중국>의 저자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교수의 어느 인터뷰 동영상을 되풀이해 보았다. 내가 천착하던 질문 하나가 거기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목한 부분만 요약하면 이렇다.
다수당 대표의 '매국적 경극'
그 뿌리는 한국 지식계 지배하는
中공산당 미화 리영희의 책 두 권
진실이 우상의 망령에 질까 불안
이응준 시인·소설가
‘내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슬픈 중국>을 집필한 이유는 한국인, 한국지식계의 중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교정하고 싶어서였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은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찬사 등 너무 많은 오류를 지닌 채 그런 악영향의 주된 원인이었다. 반독재투쟁을 하던 진보진영에서 중국(공산당) 미화작업이 시작됐고, 그게 극적으로 드러난 게 리영희의 책들이었다. 연구 중 내가 놀랐던 건 1960~70년대 한국 신문들의 중국 현실 보도들이 매우 객관적이고 정확했으며 이미 그 시절 국내외에 문화대혁명에 관한 세계적인 ‘한국인’ 역사학자가 여럿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지식계는 리영희라는 아마추어 역사학자가 쓴 엉터리 이론에 완전히 지배당했고 끝없이 좌편향해 갔다. 1980년대가 그랬고, 아직도 그런 거 같다.’리영희는 생전에 항상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이라고 강변(强辯)했다.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마오쩌둥 이런 것들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적나라한 증거들이 바다를 이룬다. 히틀러의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한 짓은 마오쩌둥 공산당이 중국인들에게 한 것에 비하면 그 스케일이 촉법소년(觸法少年)에 불과하다. 마오쩌둥은 역사상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다. 최근 중국대사 관사 ‘국장급 위안스카이’ 앞에서 대한민국 다수당 대표가 벌인 일종의 ‘매국적 경극(京劇)’의 뿌리에도 리영희가 있다.
솔직히 내겐 리영희를 비판할 의욕이 없다. 그런 글들은 지금도 여기저기 없지 않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이 남한을 후릴 때 그것을 반박하던 신문이나 책들이 버젓이 있었던 것처럼. 훗날 리영희는 자신의 오류들에 대해 그건 시대적 한계였다는 식으로 얼버무렸지만, 천만에.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저 두 권이 아직도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짜 시대적 한계일 뿐. 내 관심사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한국인들은 진실과 거짓이 다 드러난 상황에서 멀쩡하게 거짓을 선택했다. 그렇지 않았다고, 우리의 기억이 스스로 조작할 뿐이다. 대체 ‘홀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거짓을 믿지는 않지만, 거짓의 힘은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지식인이 바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날 좀 알아 달라”는 것이고 대중이 바라는 것은 진실은커녕 그 시대의 ‘자극제(stimulant)’다.
역설적이게도 뛰어난 사회과학이론은 완벽한 이론이 아니라 장점과 오류가 분명한 이론이다. 옳은 이론이 아니라 독한 이론이다. 오류 속에서도 오래 지속되면서 수많은 변종을 생산해내는 이론이다. 가령, 공산주의가 그렇다. 심심한 진실은 극적인 거짓에 의해 외면당하게 돼 있고, 대중은 단순한 것을 따라간다. 공산주의는 단순하고 극적인 거짓말이다. 이 패턴을 깨닫고 깨부숴야 진실은 겨우 지켜지고 그 일을 통해 우리가 ‘자유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사회과학이 아니라 변종들이 끝없는 신학이론이다.
겉멋만 부리며 리영희의 말들을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던 내 청춘을 나는 주워 담을 수가 없다. 대신 나는 그걸 시대적 한계라고 변명하지는 않겠다. 사르트르가 소련을 옹호했듯 저 지옥 같은 북한을 긍정하지 않으면 지식인으로서 무슨 죄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가스라이팅 당한 나의 세대도 경멸하지 않겠다. 다만 저런 거짓은 그냥 놔두면 계속 강해지며 중국을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은 북한으로도 이어진다. “어쩌면 북한은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지 모른다”고 리영희 선생은 말했더랬다. 선생과는 달리 내가 영향력 없는 존재라는 게 이렇게 위안일 수가 없다. <슬픈 중국>은 훌륭한 책이고 그 저자는 용기 있는 사람이어서 이 둘은 합해 ‘진실’을 이룬다. 하지만 그 진실이 우상의 망령과 싸워 이겨내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에 나는 젖는다. 그 패배감을 떨쳐버리려 이 글을 쓴다. 인간에게는 남을 노예로 삼는 것보다 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과거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되고, 그것은 이 사회도 이 나라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