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도 위안도 없지만, 의문이 떠오르면 계속 펼쳐보게 되는

[arte] 김현주의 탐나는 책
아사드 하이더, , 권순욱 옮김, 두번째테제, 2021

정체성 정치: 교집합이 아닌 합집합으로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2021년 말 아사드 하이더의 <오인된 정체성: 계급, 인종, 대중운동, 정체성 정치 비판>을 읽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우선은 비자이 프라샤드의 <제3세계의 붉은 별>과 사이토 고헤이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를 읽고 나서 두 책을 낸 두번째테제 출판사의 책들을 더 읽어보자고 생각한 참이었다.두번째테제는 순전히 출간 책 목록만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응원하게 되는 출판사인데, 어느 날 문득 목록을 펼치면 늘 당시 궁금해하던 문제를 다룬 책이 새로이 출간되어 있었다. 또 하나는 그해 초 편집을 담당했던 <랭스로 되돌아가다>라는 책에 직접 붙인 “계급 정체성과 성 정체성은 어떻게 교차하는가?”라는 소개 문구 때문이었는데, 조금 더 고심해서 단어들을 사용했어야 했던 것은 아닌지, 유행하는 담론에 너무 손쉽게 올라탄 것은 아닌지 신경이 쓰여 <오인된 정체성>을 읽으며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파키스탄계 미국인으로 좌파 정치에 대해 여러 논쟁적인 글을 발표해온 아사드 하이더는 책의 도입부에서 무슬림과 백인으로부터 당한 이중의 속박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열심히 설득한다. 이런 생기 없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몇몇 이들은 근본주의의 위안을 선택하고 만다. 또 다른 이들은 정체성이라는 위안을 선택한다.”

우리는 한동안 모든 주변적 정체성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소수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 정당성을 담보하고 있는 말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적어도 진보를 자임하는 이들의 세계에서는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그런데 아사드 하이더는 왜 정체성이 ‘위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에 따르면 정체성 정치는 개인의 정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 정체성들을 당연한 것으로 보며, 모든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숨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이들과 상이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는 집단적 자기 조직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약화시킨다.”

정체성 정치의 프레임은 정치를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집단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인정을 획득하고 배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환원해버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정체성 정치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비판하고자 추진했던 바로 그 규범을 강화하고 만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현대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를 처음 정치적 담론으로 도입한 흑인 레즈비언 단체 컴바히강공동체에게 이 말은 정치가 개인들의 구체적 정체성들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들은 “계급환원주의적인 노동운동이나 백인 여성 중심의 페미니즘 운동, 흑인 남성 중심의 흑인운동 등을 비판하면서” 스스로의 삶과 경험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연대를 구축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이해했다.이 책은 여러 정체성 가운데 ‘인종’에 주목, 클린턴의 대선 캠페인에서 ‘교차성’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버니 샌더스를 중심으로 민주당 내부에 등장한 좌파의 도전과 맞서기 위해 정체성 정치를 이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어떻게 이 용어가 정반대의 정치적 성격을 지닌 이들에게 흘러가는지 보여준다. 정체성 정치는 이렇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통합되면서 진정한 해방 프로젝트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정체성이라는 위안에 안주하지 않고 해방적인 정치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수한 정체성과 모습을 지닌 우리 모두를 위한 공간”을 생각했던 컴바이강공동체의 초창기 목표와 그들이 수행한 정치적 실천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인종의 자리에 우리가 최근 통렬하게 경험했던 젠더, 성소수자, 장애인, 난민의 문제를 놓고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거쳐 다시 “랭스로 되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