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음식평론가는 권력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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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셰프 겸 칼럼니스트음식평론가란 직업은 아직 우리에게 생소하다. 먹는 것에 진심인 나라치곤 전문 평론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이유에 대해선 여러 추측이 있다. 전 국민이 음식 전문가란 점, 남의 밥그릇에 딴지 거는 걸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빠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식문화가 체계적으로 자리 잡기 힘들었다는 점 등이다.
평론가는 상위 포식자?
평론가란 평론 대상의 시대적 의미를 짚거나 창작자의 의도와 현상의 함의를 저마다의 논리로 펼쳐내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방점은 ‘저마다’에 찍힌다. 평론가는 본인이 가진 걸 바탕으로 대상의 심연에서 의미를 길어올린다. 대상의 가치를 명징하게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창작자를 고무시키기도 하고,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평론은 권력화되기도 쉽고, 조롱받기도 쉽다.음식 영화에서 평론가는 멀쩡한 레스토랑을 폐업시킬 만한 힘을 가진, 마치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상위 포식자로 묘사된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에서 주인공 칼 캐스퍼는 자신의 음식을 혹평한 평론가를 욕하다가 직장을 잃고 푸드트럭을 운영하게 된다. ‘라따뚜이’에선 레스토랑을 벌벌 떨게 하는 악명 높은 음식평론가 안톤 이고가 등장한다.
현실에선 어떨까. 서구에서 음식평론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18세기부터 유럽 대도시를 중심으로 식당과 음식 정보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음식평론가들은 가볼 만한 레스토랑을 발굴했고, 그 과정에서 스타 셰프들이 나왔다. 일종의 권력을 행사하다 보니 음식평론가는 속물에 까탈스러운 사람이란 선입견도 생겼다.지금은 달라졌다. 감정사마냥 음식이나 서비스 수준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음식평론가도 있지만,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식당을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설해 주는 평론가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2018년 타계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음식평론가 조너선 골드다.
'평론가=미식가' 아냐
그는 LA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길거리 음식, 소규모 식당, 소수인종이 운영하는 식당에 대한 평론을 꾸준히 남겼다. 음악평론가가 음악의 좋음에 대해 논하지 않듯 그도 음식이 맛이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는다. 골드는 맛을 논하는 대신 그들의 사연과 문화적 의미에 더 관심을 뒀다. 음식평론가란 더 많은 사람이 음식을 모험하고 즐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란 걸 보여줬다.‘아메리칸 셰프’와 ‘라따뚜이’에 등장하는 두 평론가는 나중에 셰프들의 후원자이자 레스토랑 투자자로 변모하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결국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은 나의 적이었다’는 훈훈한 마무리 같아 보이지만, 평론가란 직업윤리가 그토록 가벼운 것인가 싶어 개운치 않다.
두 영화를 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요리사가 자신의 음식을 기쁘게 먹는 이들을 위해 살아간다면, 음식평론가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요리사가 앞으로 나아가게끔 채찍을 든 평론가일까, 사람들이 음식을 제대로 잘 느낄 수 있게 횃불을 든 평론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