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침체가 낳은 유산…日 '시성비' 바람

일본인 소비 新풍속도

최근 히트곡들 전주 없이 시작
오디오북·0초 라멘 등 인기몰이

장기 침체 겪으며 자란 젊은 층
미래 불안에 극도의 효율 추구
기업들은 경영 전략으로 활용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최근 일본에서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에 이어 ‘시(時)성비’(시간 대비 성능)가 대세다. 개인의 라이프스타일부터 기업의 경영 전략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상으로 떠오르면서 ‘타임 퍼포먼스’를 줄인 ‘타이파’라는 말까지 생겼다. 극도의 시간 효율을 추구하는 시성비 현상의 이면에는 30년 장기침체를 겪은 일본인들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노래에서까지 ‘시간 아끼자’

일본의 시성비 문화는 대중음악의 변화로 드러난다. 1980~1990년대와 2011년 일본 20대 히트곡의 도입부는 평균 17초로 30년째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2021년 20대 히트곡의 도입부는 평균 6.3초로, 10년 새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1997년 발표된 아무로 나미에의 ‘캔 유 셀러브레이트’의 도입부는 29초인데, 요아소비의 ‘밤을 달리다’와 원피스 수록곡 ‘신시대’ 등 최근 인기곡의 도입부는 0초다. 전주 없이 ‘다짜고짜’ 노래가 시작된다. 전문가들은 정기구독형으로 음악을 무제한 골라 듣는 시대가 되면서 생긴 변화라고 설명한다. 첫 소절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곡을 소비자들이 외면하다 보니 작곡가들이 도입부를 과감하게 생략한다는 것이다.

시성비 수요를 발 빠르게 공략하는 서비스도 줄지어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다. ‘들으면서’를 뜻하는 ‘기키나가라(聞きながら)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콘텐츠를 들으면서 다른 일을 해 시간을 절약하려는 목적이 반영됐다. 책을 읽어주는 서비스인 ‘오디오북재팬’의 이용자 수는 2019년 100만 명 미만에서 2022년 250만 명으로 급증했다. 실용서 한 권을 10분 분량으로 요약해서 읽어주고 월 2200엔(약 2만원)을 청구하는 서비스 ‘플라이어’의 회원 수는 2019년 50만 명에서 지난해 100만 명을 돌파했다. 책 읽어주는 서비스를 운영하는 오토뱅크의 구보타 유야 사장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창출된 시장”이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의 미래 불안감 반영

먹는 시간도 아끼고 싶은 일본인들의 취향을 공략하는 음식도 등장했다. 생활에 필요한 영양소를 한 끼에 담은 ‘완전 영양식’이 인기다. 2016년 설립된 베이스푸드는 빵 외에 파스타, 쿠키 형태의 완전 영양식을 내놨다. 전립분에 콩과 다시마 등 10종류 이상의 식재료를 섞어 한 끼로 하루 동안 필요한 영양소를 3분의 1 이상 섭취할 수 있다. 닛신식품이 작년 4월 내놓은 ‘0초 치킨라멘’은 발매와 동시에 매진됐다. 먹는 시간을 줄이려는 젊은 세대의 취향에 딱 들어맞은 상품이라는 점이 인기 비결로 꼽힌다. ‘라면땅’과 같은 라면과자나 라면수프를 뿌린 봉지라면과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닛신식품 관계자는 “어디서나 한 손으로 먹을 수 있는 식품”임을 강조한다. 일본푸드서비스협회에 따르면 패스트푸드 시장이 성장세를 이어가는 반면 이자카야 시장 규모는 13년 연속 줄었다.니혼게이자이신문의 나카무라 나오후미 칼럼니스트는 시성비 현상을 “디지털 기술이 인간을 편리하게 해준 동시에 바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젊은 세대가 유독 시성비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후지타 유이코 메이지대 교수는 “30년 장기침체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등으로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낸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뒤진 일본의 미래를 불안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후지타 교수는 “시간이라는 자원을 유용하게 사용함으로써 남들보다 빨리 성장해 안심하고 싶다는 의식이 강한 세대”라고 덧붙였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