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의 그녀들, 김서형과 미야자와 리에의 '평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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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여배우열전▲드라마 '오늘은 매울 지도 몰라'의 김서형과 한석규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김서형은 요즘 너무 말랐다.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살을 뺀 건 아닌 듯이 보인다. 마치 거식증 환자처럼 말랐는데 그건 순전히, 그리고 이건 내 추측이지만, E&A 드라마 ‘종이달’ 때문으로 보인다. ‘종이달’의 여인 이화는 온갖 노이로제에 시달린다. 그녀가 찾고 싶었던 것은 자신, 곧 자아이다. 그녀는 남편의 부속물처럼 살았다. 갖고 싶었던 아이도 여의치 않게 됐다. ‘경단녀’를 끝내고 들어간 은행에서 그녀는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그녀가 돈을 훔치고(빼돌리고) 젊은 연하 남자와 ‘바람’이 난 것은 욕망 때문이 아니다.
거꾸로 그건 결핍 때문이며 횡령과 외도가 어쩌면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유일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법률적으로는 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문학적’으로는 죄가 없다. 드라마 ‘종이달’이 보여주고 싶은 대목일 것이다.▲종이달에서 '이화' 역을 맡은 김서형
신경쇠약에 걸린 여자가 통통하면 그게 말이 안될 것이다. 제작진은 김서형에게 이화 역을 제안하면서 조금 더 마른 얼굴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서형은 더 나아갔을 것이다. 김서형 스스로 히스테리컬해졌을 것이다. 주인공 이화에 심하게 몰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경력도 생각했을 것이다. 김서형은 지금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시기이다. 게다가 일본 여배우 미야자와 리에와 비교될 판이다. ‘종이달’은 동명의 일본 NHK드라마와 영화를 한국적 드라마로 확장, 리메이크한 것이다. 미야자와 리에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왔었다. 미야자와 리에에게 있어서도 영화 ‘종이달’은 하나의 분기점 같은 작품이었다. 10년만의 재기작이었던 데다 그녀의 나이 마흔을 넘긴 때였기 때문이다. 미야자와 리에보다 연기가 좋지 않다는 얘기, 그렇게 그녀와 비교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김서형은 엄청 신경을 썼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바싹바싹 마르게 됐을 것이다.
한번 더 미야자와 리에 얘기를 해서 좀 그렇지만, 김서형은 리에에게 동일시 됐을 가능성이 높다. 둘은 73년생으로 나이도 같다. 미야자와 리에는 1991년 18세의 나이에 ‘산타페’라는 사진집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누드화보집이다. 김서형은 2003년 봉만대 감독의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이란 영화로 비로소 주목받는 배우가 됐다. 두 사람은 자신의 ‘몸이 담고 있는 얘기’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무던히 애를 썼다. 일종의 ‘육체의 누명’이 만들어 낸 굴레들이었을 것이다.
2000대 초반은 한국의 남성들이 야한 영화에 굶주려 있을 때이다. 영국 작가주의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의 ‘나인 송스’같은 예술영화가 중년남들 사이에서 포르노 딱지가 붙은 채 파일이 돌아다니던 ‘천박한’ 시절이었다. 영화 속에 리얼 섹스가 나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안다. 김서형이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인기와 그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무던히도 애를 썼으며 작품성을 평가받았음에도 늘 마음의 짐을 지니고 살아 왔음을. 하지만 영화 ‘맛섹스’는 김서형이 가장 예쁘게 살이 오르고 청순했던 시기이긴 했다. 작업실에서, 공원의 공중 화장실에서, 김서형(신아)은 김성수(동기)와 뜨겁게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찬란한 젊음을 발산시켰다.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그때의 화양연화를 김서형 본인도 잊지 못할 것이다.▲미야자와 리에
늘 숏 컷의 짧은 머리로 보이시한 외모를 풍기지만 조근현의 2014년 영화 ‘봄’에서의 김서형은 우아함 그 자체였다. 미술감독 출신이 만든 영화답게 시각적 쾌감이 만만치 않았던 영화 ‘봄’에서 김서형은 비로소 (식자층 중에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지만) 섹스영화 출신의 배우가 아니라 연기파 배우임을 입증해내는 데 성공했다. 10년만이다. 김서형은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 스스로 자신이 배우 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는가를 고백한 적이 있는데 10년의 무명생활, 그 무명생활보다 더했던 또 다른 10년을 견뎌내고 이겨내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 '봄'에서 바느질하는 정숙 ‘봄’에서 김서형은 정숙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화가인 남편 준구(박용우)를 위해 그녀는 몸이 예쁜 누드 모델을 직접 찾아 나서고 민경이란 여자(이유영)를 찾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이유영의 정면 누드를 선보이는 파격을 일으키지만 그보다 기억에 남는 건 고운 (개량) 한복을 입고 양장의 우산을 쓴 채 드디어 남편의 여자를 구해 다행이라는 듯 살짝 미소를 머금은 김서형의 표정이다.
준구의 뮤즈는 민경이 아니고 정숙이었다. 때는 초여름이고 풀 쇼트의 스크린은 온통 녹색 천지가 되어 가는데 저 멀리 벌레 소리가 돌비 사운드로 휘감고 들어 온다. 영화 ‘봄’은 잘 찍은 영화지만 버림받았다. 김서형 연기의 최고 작품을 꼽으라면 당당하게 뽑힐 작품이 바로 이 영화 ‘봄’이다.
김서형의 블록버스터 영화 ‘악녀’는 별로였다. 김서형은 여기서 마치 레즈비언같다. 주인공 김옥빈을 교련하는 차갑고 억압적인 여성으로 나온다. 이럴 때 김서형은 늘 목 끝까지 셔츠 단추를 채운다. 답답하다. 영화도 답답했다. 김서형은 역시 다소 작은 영화에 어울린다. 2021년에 나온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 모교’에서 김서형은 학교 주변 구멍가게에서 메론바를 먹으며 걸어간다. 메론바를 가장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여배우는 김서형밖에 없다. 메론바가 그때부터 더 잘 나갔다는 소문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김서형은 TV쪽에서 이름과 돈을 더 얻었다. 아마도 ‘기황후’ ‘굿 와이프’ ‘SKY 캐슬’ 등이 그녀의 이름을 점층법적으로 최고 위치까지 오르게 한 작품들일 것이다. 그녀는 이들 작품들로 명실공히 스타덤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드라마에서 김서형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작품적으로 약간 ‘버림받을 때’가 좋다. 최근에 나온 작품으로 수작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드라마는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가 있다. 고바아시 가오루 주연의 ‘심야식당’을 부부의 뒤늦은 러브 스토리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될까. 눈물 콧물을 짜낸다. 김서형(다정)은 밥을 못 먹는다. 시한부로 죽어간다. 남편 한석규(창욱)는 매번 그녀를 위해 제대로 된 ‘한 끼’를 마련하려 애쓴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창욱이 늘 했을 법한 대사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 다정이 짓는 ‘다정한’ 표정이 망막에 남는다. 김서형은 약간 순애보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때가 좋다. 아니다. 그건 순애보적 여자와 살고 싶은 남자의 이기적 욕망의 반영일 수 있다. 김서형은 김서형이어서 좋다. 그게 옳다.
사진=키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