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달이 뜨고, 바닷물이 차오른다…눈동자의 화가 임춘희

[arte]후후씨의 인사동 편지
눈 속에 달이 떴습니다. 바닷물도 차오릅니다. 쟁반 만한 두 눈에 먹먹한 풍경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무너져내릴 듯한 눈물둑을 입꼬리가 애써 틀어막고 있는 듯합니다. 5호 남짓한 캔버스를 채운 얼굴은 화폭 너머로까지 슬픔의 물결을 번져냅니다. 제목마저 저릿합니다.
아무것도 너를1, Oil on canvas, 30x30cm, 2021
임춘희 작가는 눈(目)에 진심인 작가입니다. 초기엔 눈 형태를 연속 복제하거나 공허한 눈들이 떠다니는 의식 너머의 풍경 같은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눈에 마음을 담기 시작합니다. 눈과 마음이 만나는 많은 작품들 중 ‘정직한 시선’이라는 제목이 재미납니다. 세상에 이런 제목의 그림도 가능한가 봅니다. 과연 그 눈빛이 어떤 모양일지 작품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친 김에 ‘사랑주지 않는’, ‘사랑받고 싶은’ 같은 제목의 작품들도 말입니다. 세상의 무수한 나와 너 사이의 안타까운 어긋남들이 떠오릅니다. 어눌함과 투박함 속에 무심한 듯 숨겨놓은 섬세한 감성과 낭만에 미소도 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질 것입니다.
아무것도 너를2, Oil on canvas, 50.3x70.4cm, 2016-2021


선수가 선수 알아본다고,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임춘희 작가가 그런 작가입니다. 주머니 사정 뻔한 작가들이 이 작가 작품을 사고 싶어 그림을 들었다놨다 합니다. ‘멍 때리기 대회’를 기획한, 넘치는 개성에 쿨내 진동하는 웁쓰양 작가는 진즉에 지른 모양입니다. 왕방울만한 눈에 애틋함 가득한 남녀가 서로를 향해 마음을 기울이는 ‘아무것도 너를2’라는 작품입니다. 웁쓰양 작가는 이 작품을 폼나게 걸기 위해 벽지까지 새로 발랐다고 합니다. 임춘희 작가가 인스타그램에 감사의 메시지를 올려 알게 됐습니다.

팔린 그림은 희한하게도 더 좋아보이는 법인지라, 이 작품은 볼수록 그윽합니다. 오래된 마음 두 개가 비로소 서로에게 가닿은 순간이라고 믿고 싶어집니다. 눈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존재의 세계를 마주하는 큰 일입니다.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눈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슬픔을 품어내며, 천천히 나아갈 것입니다.
‘걷는 사람’ 또한 임춘희 작가 하면 바로 떠오르는 단골 소재입니다. 그림 속에서 작가는 산과 들, 나무와 풀, 바람과 구름 속을 걷습니다. 겨울에는 눈 쌓인 숲을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몸으로 지나고 여름엔 나뭇잎 펄럭이듯 걷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산책습관은 걷는 행위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작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순환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해 동안은 걷기 힘들 정도로 많이 아팠고, 다행히 최근의 수술 후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작가의 인스타그램에는 ‘어서 나아서 좋은 그림 그려달라’는 팬들의 기분 좋은 성화가 이어집니다.
겨울바람9, 40.9x31.8cm, oil on canvas, , 2021
밤산책 3, Night Walk 3, gouache, acrylic on paper, 12.2x19.1cm, 2021


작가에게 산책이란 마음의 길을 잃는 것, 자신만의 황량함을 확인하는 것, 흔들림, 불안감 등 못다한 감정들과 만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마음을 다해 붓질로 표현한 것이 그림이라고 설명합니다. ‘마음을 다한 붓질’이라는 말이 오래토록 마음에서 덜컥거립니다. 사소하고 의미없는 것들을 온 마음으로 드러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 아닐까 싶습니다. 무용한데 정성스럽고, 그래서 덧없고 아름다운 그런 거 말입니다.
그림 한 점 가까이 들여다볼까 합니다. ‘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1’이라는 제목의 최근작입니다. 푸르른 날 산책을 나선 두 사람은 대놓고 나무를 닮아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뻗어있는 팔은 나뭇가지입니다. 머리칼도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들 같습니다. 눈 감은 사내의 얼굴은 세월을 견딘 나무 외피 같고 여인 얼굴은 초록빛입니다. 투박한 붓질자국 두드러지는 몸의 표현, 이와 대비되는 섬세한 얼굴, 나무의 정령 같은 신화적 존재들, 시각적인 리듬감 등이 우화의 한 장면 같이 뜬금없으면서 신비롭게 어우러집니다. 그러면서 내밀한 슬픔도 엿보입니다. 함께 나선 길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외롭고, 그렇기에 팔 뻗어 닿으려 하고, 나무든 사람이든 흔들리기에 살아있는 존재라는, 삶을 향한 선선한 고백 같기도 합니다.
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1, oil on canvas, 91x91cm, 2021-2022


숱한 시간을 들판과 숲길을 걸어왔지만 작가의 시선은 영원하고 준엄한 존재로서의 자연에 가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예술가들을 들볶아온 욕망 같은 것을 향해 있지도 않습니다. 그저 매일 나섰다가 어김없이 귀환하는 산책처럼, 오래된 마음 같은 것들을 꺼내보는 별스럽지 않은 일들을 이어가는 듯 보입니다.
작가의 작업노트 속 표현을 빌리자면 ‘사소하고 의미 없을,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감정의 고백’을 ‘정성스런 붓질’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임춘희 작가의 작품들은 눈부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마음들은 필시 외로웠을 터이고, 외로움과 동행하는 마음들이 흘린 눈물들은 분명 반짝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가의 그림들이 빛나는 듯 보이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