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을 올리고 포구를 떠나라!” [고두현의 인생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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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20년이 지나면 당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더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 닻을 올리고 포구를 떠나라. 당신의 돛에 무역풍을 가득 안고 출발하여 탐험하라. 꿈꾸라. 그리고 발견하라.”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의 명언이다.그는 개척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 때 아버지를 잃고 인쇄소 견습공, 미시시피강 수로 안내원, 광부를 거쳐 신문기자와 대문호로 성공한 ‘미국 문학의 아버지’다. 본명은 새뮤얼 클레멘스이고, 마크 트웨인은 그의 필명이다.
‘마크 트웨인’은 뱃사람 용어로 증기선의 안전 항해 수역을 나타내는 수심 두 길(약 3.7m)을 뜻한다. 어린 나이에 미시시피강 증기선의 견습 수로안내원이 된 그는 뉴올리언스~세인트루이스 구간을 운행하는 증기선을 탔다. 그 증기선의 선장으로부터 강물 속의 암초 등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피하는 법을 자세히 배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의 수심을 정확하게 읽는 능력이었다. 수로안내원은 수심측정수로부터 강물의 깊이를 수시로 보고받았다. 미시시피강의 증기선이 운항하는 데 필요한 안전수심은 3.6m였다. 이를 해양 용어로 투 패덤(Two fathom)이라고 했다. 1패덤은 6피트(1.8m)다.갑판 위는 늘 시끄러웠다. 선원들은 엔진 소음으로 시끄러운 배 위에서 “투 패덤”을 줄여서 “트웨인(Twain)”이라고 외치곤 했다. “마크(mark) 트웨인”이라고 하면 “3.6m 유지”라는 뜻이다.
어릴 때부터 험한 강을 오르내리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온갖 인물을 만난 덕분에 그는 작가로서 엄청난 이야깃거리를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내면 심리와 위선의 이면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해 필명을 마크 트웨인으로 정했다.
미국은 당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바뀌는 격변기였다.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가 남북전쟁에서 이긴 뒤 산업화가 급속하게 이뤄지던 때이기도 했다. 그는 서부개척 시대에 광산 개발에 참여했다가 빚만 잔뜩 짊어지고 파산했다. 자동식자기 사업 투자도 실패했다. 브래지어 후크 등 많은 발명과 특허를 개발했지만 이 또한 빛을 보지 못했다.이렇게 연속되는 부침과 흥망 속에서도 그는 삶의 지혜와 통찰을 키웠고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노하우를 익혔다. 그리고 뛰어난 상상력과 유머, 품격 있는 해학으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마크 트웨인 특유의 풍자와 재치는 흉내 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인간 본성에 숨은 폭력과 잔학성, 이기심과 어리석음을 기발한 유머로 풀어냈다. 지금도 그의 글을 따라 읽으며 한참 웃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우둔함과 부끄러움을 깨닫고 움찔 놀라게 된다.
그는 마침내 “모든 미국 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부터 나온다”(헤밍웨이)는 평가와 함께 “남북전쟁과 서부 개척기의 미국 사회를 최고의 걸작들로 엮어냈다”는 극찬을 받았다.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새로운 일을 벌이길 좋아한 그는 “나도 실패할까 봐 두려웠지만 항상 포기하지 않고 용기 있게 덤볐다”며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 극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 앞으로 20년이 지난 뒤 우리는 어떤 일 때문에 후회할지 모른다. 그러니 당장 닻을 올리고 안전한 포구를 떠나자. 대양을 향해 돛을 올리며 탐험하자. 꿈꾸자. 발견하자.
고두현 시인 kdh@hankyung.com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의 명언이다.그는 개척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 때 아버지를 잃고 인쇄소 견습공, 미시시피강 수로 안내원, 광부를 거쳐 신문기자와 대문호로 성공한 ‘미국 문학의 아버지’다. 본명은 새뮤얼 클레멘스이고, 마크 트웨인은 그의 필명이다.
‘마크 트웨인’은 뱃사람 용어로 증기선의 안전 항해 수역을 나타내는 수심 두 길(약 3.7m)을 뜻한다. 어린 나이에 미시시피강 증기선의 견습 수로안내원이 된 그는 뉴올리언스~세인트루이스 구간을 운행하는 증기선을 탔다. 그 증기선의 선장으로부터 강물 속의 암초 등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피하는 법을 자세히 배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의 수심을 정확하게 읽는 능력이었다. 수로안내원은 수심측정수로부터 강물의 깊이를 수시로 보고받았다. 미시시피강의 증기선이 운항하는 데 필요한 안전수심은 3.6m였다. 이를 해양 용어로 투 패덤(Two fathom)이라고 했다. 1패덤은 6피트(1.8m)다.갑판 위는 늘 시끄러웠다. 선원들은 엔진 소음으로 시끄러운 배 위에서 “투 패덤”을 줄여서 “트웨인(Twain)”이라고 외치곤 했다. “마크(mark) 트웨인”이라고 하면 “3.6m 유지”라는 뜻이다.
어릴 때부터 험한 강을 오르내리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온갖 인물을 만난 덕분에 그는 작가로서 엄청난 이야깃거리를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내면 심리와 위선의 이면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해 필명을 마크 트웨인으로 정했다.
미국은 당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바뀌는 격변기였다.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가 남북전쟁에서 이긴 뒤 산업화가 급속하게 이뤄지던 때이기도 했다. 그는 서부개척 시대에 광산 개발에 참여했다가 빚만 잔뜩 짊어지고 파산했다. 자동식자기 사업 투자도 실패했다. 브래지어 후크 등 많은 발명과 특허를 개발했지만 이 또한 빛을 보지 못했다.이렇게 연속되는 부침과 흥망 속에서도 그는 삶의 지혜와 통찰을 키웠고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노하우를 익혔다. 그리고 뛰어난 상상력과 유머, 품격 있는 해학으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마크 트웨인 특유의 풍자와 재치는 흉내 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인간 본성에 숨은 폭력과 잔학성, 이기심과 어리석음을 기발한 유머로 풀어냈다. 지금도 그의 글을 따라 읽으며 한참 웃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우둔함과 부끄러움을 깨닫고 움찔 놀라게 된다.
그는 마침내 “모든 미국 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부터 나온다”(헤밍웨이)는 평가와 함께 “남북전쟁과 서부 개척기의 미국 사회를 최고의 걸작들로 엮어냈다”는 극찬을 받았다.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새로운 일을 벌이길 좋아한 그는 “나도 실패할까 봐 두려웠지만 항상 포기하지 않고 용기 있게 덤볐다”며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 극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 앞으로 20년이 지난 뒤 우리는 어떤 일 때문에 후회할지 모른다. 그러니 당장 닻을 올리고 안전한 포구를 떠나자. 대양을 향해 돛을 올리며 탐험하자. 꿈꾸자. 발견하자.
고두현 시인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