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킬러 문항' 없애라고 하자…대치동 학원은 '준킬러' 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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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에 선 한국 교육“쉬운 수능 기대에 반수생 문의가 1.5배는 늘었습니다. 한두 반가량 증설을 검토 중입니다.”(목동의 한 대형학원 원장)
(4) 쉬운 수능 마케팅 나선 사교육계
학부모 68% "교육정책 불확실"
새 대책 나오면 불안감에 학원행
대치동·목동, 이미 새 지침 마련
중상위권엔 "한결 유리해졌다"
강사 추천하고 반수생 반 확대
윤석열 대통령의 ‘사교육 경감’ 지시가 나온 지 닷새가 지난 20일 서울 대치동과 목동 학원가는 예상과 다른 모습이다. 정부의 엄중단속 예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학원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기대를 보였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로 혼란스러운 학부모와 학생들의 발길이 학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학원가의 논리다.
대치·목동 학원가 ‘사교육 불사’ 팽배
이날 현장에서 만난 학원 관계자들은 “쉬운 수능이든 어려운 수능이든 사교육 시장은 절대 축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윤 대통령 발언 이후 불안감에 학원을 찾는 학생과 학부모가 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대치동에서 6년째 종합학원을 운영 중인 한 원장은 “대통령 발언 이후 학부모 상담 문의가 3~4배 늘고 상담 시간도 2~3배 길어졌다”며 “수능 문제 틀까지 뒤흔들 것처럼 비쳐 당장 수능 전략을 바꿔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사교육 경감을 위해 ‘킬러 문항’을 내지 않겠다는 정책의 대응책도 발 빠르게 마련 중이다. 상위권 학생에겐 실수를 줄이기 위한 문제풀이반을 권하고 중상위권 학생에게는 ‘한결 유리해졌다’며 새 강사나 교재를 추천하는 식이다. 대치동의 한 학원 강사는 “일종의 불안 마케팅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고 말했다.
‘킬러 문항’대신 ‘준킬러 문항’에 대비하는 학원도 생겼다. 쉬운 수능으로 반수생이 늘어날 것이란 기대에 반수생반 확대를 준비 중인 학원도 여럿이다. 일부 대형학원은 대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할인 혜택을 주겠다는 문자까지 돌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원 관계자는 “대학 기말고사가 끝나는 6월 중순부터 반수생 시즌이 시작되는데 이번 정부 발표 이후 불이 붙었다”고 설명했다.정부 정책이 닿지 못한 탐구 영역으로 사교육 풍선효과가 나타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정부가 국어, 수학 등 공통과목의 킬러 문항을 지적했는데, 사실 킬러 문항이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부분은 과학탐구라는 지적이다. 의대에 가기 위해 재수를 하고 있다는 A씨는 “비문학은 처음 보는 문항을 독해력으로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공정한 편”이라며 “과학탐구는 범위는 좁아졌는데 문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일부 사설 학원의 모의고사를 풀어보지 못하면 만점을 받을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장기적인 정책 비전 필요
교육 전문가들은 학원들의 불안 마케팅이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대통령의 발언은 원칙론에 가깝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홈페이지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성격과 목적을 규정하는 부분에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는 출제로 고등학교 학교교육의 정상화 기여’라고 적혀 있다. 대통령의 지시와 일치한다. 이번에 수능을 보는 고3 학생이 치르는 2024학년도 대학입시 요강은 이미 확정돼 있다. 대입전형 4년 예고제로 현재 고등학생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제도가 바뀔 가능성은 없다. 목표로 한 대학, 학과에 맞게 준비하면 되는 셈이다. 하지만 학원가에서 ‘수능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며 불안을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전문가들은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장기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전국 400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국민의 46.4%가 우리나라 교육 정책 추진에 중점을 둬야 할 측면으로 장기적 비전을 꼽았다. 일관성(18.8%)까지 합치면 전체의 65.2%가 ‘불확실성’을 가장 고쳐야 할 정책으로 꼽은 셈이다. 설문 대상자 중 초·중·고 학부모만 따로 계산하면 이 비중이 68.4%까지 올라간다.한 교육 업계 관계자는 “입시제도가 널뛰기하듯이 흔들리니까 정부에서 무슨 대책만 나오면 일단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다”며 “일관성 있는 정책을 꾸준히 시행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강영연/이혜인/이광식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