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으로 화산을 터뜨리고, 콩으로 섬을 짓는 정정엽[전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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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엽 개인전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
한국 여성주의 미술 대표 작가의 신작 23점
콩 팥 감자 나물 등 평범한 소재에 생명력 부여
징그럽고 낯선 존재로 여겼던 '벌레'도 회화로
"구상이자 추상인 독보적 작품세계"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8월 18일까지
콩과 팥. 우리가 흔히 먹는 한국의 대표 작물들이다. 이 땅에 이 생명들을 키워온 건 우리 어머니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땀흘린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이 작물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씨앗-땅 1, 2023, oil on canvas, 30x30cm
▲못 다한 말(부분), 2022, acrylic oil on canvas, 130x194cm
정정엽(61)은 이런 콩과 팥을 캔버스 위에 한 알 한 알 그리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표 작가다. 그는 "콩은 움직이는 점이기도 해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작가는 안료 묻은 붓을 캔버스에 찍고, 오일로 닦아내길 수십 번 반복한다. 문질러서 번지듯 그려내 입체감을 준다. 일반적인 방식처럼 밝은 물감을 덧칠해 입체감을 주는 게 아니라 이미 그린 것을 오일로 지워내면서 여백을 만들어 생동감을 주는 독특한 기법을 쓴다.
그의 작품은 구상이자 추상이다. 작가는 콩과 팥을 한 알, 한 알 구상화처럼 그려내지만, 캔버스 전체를 바라보면 추상 또는 반추상 작품이 된다.정 작가의 26번째 개인전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이 지난 21일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 전시장에서 개막했다. 지난해 이중섭미술상 수상 이후 첫 개인전으로 대표작인 팥과 콩 시리즈와 함께 '벌레'를 소재로 한 신작 등 23점이 전시됐다.
▲축제 11, 2023, oil on canvas, 91x65cm
정정엽의 콩알과 팥알은 때로 거대한 파도를 밀려오게 하고, 하늘로 올라가 수많은 별이 되기도 한다. 어떨 땐 하나의 섬이 되고 화산의 용암이 되기도 한다. 노란 콩, 검은 콩, 녹두, 완두, 붉은 팥 등을 다채롭게 그려내는 그는 "콩류는 이 땅의 모든 빛과 색을 갖고 있다.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색이 아니라 먹어서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그런 색들이다"고 말한다.
▲팥-화산, 2021, acrylic and oil on canvas, 162x130cm
그의 콩류 연작은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1995)'에서 시작됐다. 그림 속 자루에 담긴 콩을 그리던 그는 이 콩알들을 꺼내 '씨앗' 하나씩을 그리기 시작했다.
올해 신작 '축제11'에서 그는 콩알로 파를 쳤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치던 난초와 이 시대 여성작가가 그린 파의 간극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여성과 남성, 삶과 예술, 예술과 사회, 노동과 창작 간 균형은 과연 실현될 수 있는 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연둣빛 콩을 선으로 이어 꽃이 활짝 핀 파를 캔버스 위에 옮긴 셈이다.
▲잃어버린 마을2, 2023, Oil on canvas, 91x65cm
정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항상 우리 주변에 있지만 징그럽고 낯선 존재인 벌레를 소재로 신작을 그렸다. "과연 우리는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공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여태 발견하지 못한 생명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란 질문을 던지면서.
안성 미산리에서 만난 100여 마리의 벌레들을 재현한 정 작가는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징그럽고 겁나는 벌레에 2011년부터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며 "벌레마다 기기묘묘하며 대체불가한 신비로운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다.
▲나의 묘한 벌레들, 2023, 광목천위에 아크릴, 510x156cm
누가 만들었을 지 모를 편견의 껍질을 벗은 벌레의 모습은 저주받은 미물이 아니라 신기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전시의 제목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은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지함마디 문서(2~3세기에 쓰여진 여신의 신성에 대한 텍스트를 모은 것)'에 기록된 내용에서 가져왔다.이 전시는 오랫동안 하찮게 여겨졌던 여성의 살림노동, 이유 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벌레에 대한 재발견이다. 심은록 미술평론가는 "정정엽의 작품에선 일관된 미학적 줄기가 체계적으로 발견된다"며 "생명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낸다"고 말했다.
▲대체불가, 2023, 광목천 위에 아크릴 116.8x91cm
정정엽은 이화여대 졸업 후 1985년 '두렁'에 가입하면서 미술 밖에서 미술에 질문을 던졌다. 여성미술연구회를 통해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관심을 지속해 왔다. 수십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초대받고, 2018년 제4회 고암미술상과 2020년 양성평등문화인상, 2022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김보라 기자